흔해빠진독서

황정은,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시월의숲 2017. 5. 16. 00:16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난 뒤, 한동안 멍하니 책의 표지만 바라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이 책을 읽고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은 나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는가 혹은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 회색빛의 표지의 정중앙에는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인채 서 있는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었는데, 옆모습에다 긴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점처럼 아주 작은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 점처럼 아주 작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채 서 있는 사람. 점처럼 아주 작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채 서서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람이 어쩌면 표지 속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저 표지와 무척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 전체적으로 회색빛의 표지와 그 텅 빈 표지의 중앙에 아주 작게 점처럼 찍혀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이 책의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리고 제목, <아무도 아닌>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또한 책의 맨 처음 적혀 있는 문장.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는 말. '아무도 아닌'과 '아무것도 아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소설집에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이 책에 실려있는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의 제목과는 다르지만, 그 모든 소설을 아우르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모든 소설집의 제목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만큼은 더욱 강하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들의 대부분이 '아무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그들은 약하고, 소외되고, 죽음과 가깝고, 힘겹고, 고통스럽고, 미래가 없으며, 사라지거나, 죽는다. 아까 책 표지의 회색에 대서 말했는데, 그들의 그런 모습들이 마치 회색처럼 느껴졌다. 회색의 안개 속에 갇혀 서로를 보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그들 스스로가 결국 회색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그리하여 끝내는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고야 마는 그런 존재들. 내가 너무 암울하게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꾸 '아무도 아닌'을 '아무것도 아닌'으로 읽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아무도 아닌 존재들로 그려보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아무도 아닌 사람들을 아무도 아닌게 아닌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上行>에 등장하는 월식의 순간처럼. 그리고 <명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처럼.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