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현암사, 2012.

시월의숲 2017. 5. 1. 23:26



그동안 슬픔에 관한 책을 읽어보았던가. 그러니까 어떤 책을 읽고 나서 슬퍼진 기억 말고, 슬픔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을 읽어보았던가, 생각했다. 슬픔을 담고 있는 책은 많다. 슬픔을 느끼게 하는 책은 많다. 슬픔은 우리 감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심지어 나는 우리의 삶이 슬픔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슬픈 인간들의 개별적 삶이라는 것또한 어쩔 수 없이 슬픔으로 가득하다고.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그럴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든다. 내 삶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들의 거칠 것 없이 생성하는 에너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지만, 반대로 그들에게서 어쩔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도 함께 본다. 이 거친 세상에서 커나가야 하는 아이들의 운명이 너무나도 슬프고 슬퍼서 가여울 정도다. 모두들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영향 아래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운명. 나는 때로 삶의 어떤 부분이 대물림되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무섭다. 누군가를 싫든좋든 닮아간다는 사실 또한.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어쨌거나 슬픔이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이라면, 그러한 슬픔에 대해서 설명한 책을 몇 권 읽어보았을 법도 한데,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정색하고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읽었다.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라고 하는 다소 생소한 작가들의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예전에 평론가 신형철이 강의하는 문학 관련 강의를 듣다가(혹은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그게 팟캐스트였는지, 아니면 그가 쓴 평론집에서였는지 확실치는 않다. 암튼 그는 이 책을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언급했고, 나는 당시 무척 인상깊게 이 책을 받아들였던터라 망설임 없이 사서 읽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산 지는 꽤 되었으나 그동안 읽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읽게 되었는데, 그건 최근 내 심정이 슬픔의 자장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요즘의 내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시기와 질투, 애증에 더 가까웠지만, 그런 감정과 뒤섞여 있는 반대편 혹은 더 깊은 곳의 감정은 슬픔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의 심정은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의 감정과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 책이 내가 최근에 느꼈던, 슬픔과 뒤엉킨 혼란스런 감정과는 다른,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난 후 남겨진 자의 슬픔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슬픔은 내 어지러운 감정과는 달리 보다 근원적인 것, 보다 순수한 것, 보다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로지 한없는 슬픔이라는 그 감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슬픔에 맞딱뜨리고, 슬픔에 빠지며,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고, 슬픔의 흔적이 남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어렵지 않게, 자상하고, 조곤조곤한 어조로, 마치 어깨를 토닥거리듯 말을 건네는 책이었다. 슬픔에 대해서 정신의학적인 분석이나,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슬픔을 경험한 이들의 경험담과, 슬픔에 관해서 이야기한 많은 문학책들을 바탕으로 해서 슬픔의 시작에서부터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조목조목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과거에 경험한 죽음과 그로부터 시작된 슬픔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위로받고 있는듯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슬픔의 정체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한강의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라는 에세이집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랑이나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만히 응시'(이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하게 되기까지는, 사랑이나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그것에서 조금 벗어났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그 책들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슬픔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슬픔을 둘러싼 것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은 슬픔에 대한,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슬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는 책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슬픔의 위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