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2017.

시월의숲 2017. 8. 6. 18:29

 

 

 

그것은 마치, 무대에서 관객에게 즉석에서 말을 걸면서, 그 말을 글로 쓰고 있는, 그러므로 작가 자신도 다음 문장의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지 미리 계산하고 있지 않다는, 우아하고 유쾌한 자포자기의 즉흥 댄스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까지 성공한다.

물론 그 이외에도 참으로 아름답고 황량하며, 어떨 때는 이빨을 드러낸 듯하고, 방치되고 산만한 언어, 끝을 모르는 풍자와 비꼼,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무의미함과 무의도성, 그리고 마침내는 인과성과 연속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돌연하고 뜻밖인 결말들.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383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

이 책 역시, 오로지 배수아라는 작가이자 번역가 때문에 읽게 되었다. 요즘 들어서는 본인의 책보다는 번역서를 더 열성적으로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그는 내게 마치 '책 읽어주는 사람'과 비슷하다. 나는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며 그를 생각한다. 책 속에 담긴 그의 음성과 그의 색깔과 향기를 음미한다. 로베르트 발저라고 하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권 작가의 <산책자>를,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읽을 수 있었을까. 그가 번역했다는 점 외에도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작가 자신 또한 '보기 드문, 특별한 수준의 기나긴 산책자'였다고 하는, 그 스스로 산책자인 자가 쓴 <산책자>라니. 나또한 산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이 책의 제목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짧은 소설들(산문 같기도 한)이 빼곡히 실려있는 이 책은, 그가 옮긴이의 말에서 쓴 것처럼, 매우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돌연한 끝맺음, 비일상적인 흐름, 유연한듯 하면서도 돌출된 사고 같은 것들이, 표면이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마치 마차를 타고 달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일상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에 매혹되었다고,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몇몇 산문들에게서 단편적으로 그와 같은 매혹을 느꼈다. 특히 맨 처음 실려 있는 <시인>은 한 장이 채 안되는 매우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와 같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시 그 자체였다.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툰의 클라이스트>나 <원숭이>, <산책> 같은 소설들은 독특한 상상력과 무의미함과 무의도성이 잘 드러난, '즉흥적이고 고독한 왈츠'와도 같은 작품들이었다.

 

얼핏 페르난두 페소아가 떠오르기도 했으나, 이내 그 이름은 잊혀졌다. 페소아가 보다 관념적이고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면, 발저는 외부적인 것들로 인한 내면의 움직임을 그만의 독특한 인상과 사고로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배수아가 지적했듯 헤르만 헤세와도 전혀 달랐다. 로베르트 발저는 오로지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있어서 그 누구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없었다. 로베르트 발저는 로베르트 발저였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와 함께 기나긴 산책을 막 끝낸 느낌이 든다. 그와의 산책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그의 돌연한 움직임에 잠시 어리둥절한 적이 많았지만), 매혹적인 순간을 여러번 만났고, 전반적으로 영감을 자극하는 자유로운 산책이었다.

 

생전 그리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던 그는 1956년 크리스마스 아침 산책을 나간 길에서 홀로 눈밭에 쓰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생택쥐페리가 정찰비행을 나갔다가 사라져버린 것과도 같은 결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발저 역시 그날의 산책이 그의 마지막 산책이 될 줄은 아마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고 한들 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을 피할 수 있었을까. 열렬한 산책자였던 그의 마지막 죽음은 -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긴 하지만 -  그의 소설처럼 돌연하다기 보다는 무척이나 문학적인 울림을 주었다. 내가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 로베르트 발저는 '산책자'로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