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유경희, 『창작의 힘』, 마음산책, 2015.

시월의숲 2017. 9. 9. 23:07


이런 류의 책은 뭐랄까, 좀 깊이가 없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니까 앨범을 예로 든다면, 이 책은 한 뮤지션의 정규 앨범이 아니라 여러 뮤지션의 음악을 컨셉에 맞게 선곡해서 모아놓은 컴필레이션 앨범 같았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으나, 나는 매번 그런 것을 접할 때마다, 아, 이런 거 말고 한 작가의 작품을 길게 읽어보고 그의 숨결 혹은 개성에 흠뻑 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걸 갈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물을 마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갈증. 아, 물론 이런 책이 내 갈증을 해소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을 알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에 대한 내 관심이 다른 책을 읽게 해주는데까지 나아가게 하니까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창작의 힘>이지만, 결국 내게는 <독서의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 책에는 모두 24명의 예술가가 나온다. 예술가라고는 하지만 미술에 국한된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모두 화가이거나 조각가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예술가들이지만, 나는 그 중에 조지아 오키프라는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그가 그린 꽃 그림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의 제목과 그것을 그린 주인공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혹, 어느 순간 잠시 알았다가 하더라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심 기뻤다. 왜 기뻤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예전에 본 그림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였을까. 혹은 사막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들과 캠핑과 요리를 좋아한 그녀의 열정적인 삶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녀에 대한 글을 읽고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보러 멕시코에 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 충동은 그야말로 아주 잠시 나를 사로잡았지만, 그 갑작스럽고도 알 수 없던 충동에서 벗어난 후로도 나는 종종 그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지아 오키프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었음을 느꼈다.


조지아 오키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도 모두 저마다 독특하고 남다른 취향과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클림트의 산책 본능과, 로트레크의 변장 취미, 카미유 클로델의 광기, 고흐의 일본취향, 베일에 싸여있는 베르메르, 프리다 칼로의 동물 사랑, 고갱의 유랑 본능, 뭉크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실레의 나르시시즘, 앙리 루소의 원시적면서도 독특한 그림 등. 저마다 자신의 작품처럼 각각의 개성으로 충만한 예술가들. 그들의 일상과 취향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무척 흥미로웠다. 반면 어떤 갈증 또한 느끼게 했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의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었다. 앞서 이 책이 다른 책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다른 '책'이 아니라 실제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미술가들에 대한 책을 읽으면 그들의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 열망은 당장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만큼 갈증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그림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른 '책'으로 아쉬움을 달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작품이 오로지 그 작가의 취향의 산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작가의 독특한 취향과 관심 혹은 일상적인 버릇 같은 것들이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고, 보다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무척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언젠가 내가 이 책 속에 나오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그건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열망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열망이 지속되는 한 언젠가 길은 보일지도 모른다. 늘 그랬듯 예기치 못한 어느 순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