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심리

시월의숲 2017. 11. 22. 22:13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지만, 시간이 흐른다기 보다는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이건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갔다, 라고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입니다.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주위의 사물들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시간만 흘러가버린 것이죠.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새 아침이고, 일어나 머리를 감고, 차를 타고 출근을 하며, 일을 하다가 집으로 오는 길 위에 있고, 집으로 와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다시 잠을 자는 생활. 그런 생활의 어느 마디에 문득문득 인지되는 '나'라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이상한 흐름의 깨달음. 여긴 어디이고 나는 지금 무얼하고 있나, 하는 어리둥절한 의문. 아무튼 요즘 내 생활이 그렇습니다. 내 정신상태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건 무언가에 몰두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골똘히 생각할 때 나타나는 증상같은 거 말입니다. 이게 나에게 좋은 일인가? 묻는다면 딱히 무어라 대답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확실히, 요 며칠 겨울이 온 듯 추웠습니다. 뭐, 이미 겨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불과 며칠 전만해도 단풍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온통 겨울 풍경으로 변한 산과 들판이 좀 낯설게도 느껴집니다. 이제는 출퇴근 길에 얼어 있을지도 모를 도로사정을 생각해야 하고, 출근할 때 자동차의 유리에 뿌옇게 서려있을 성애와 전쟁을 치뤄야 하며,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어지고, 매일 하던 샤워가 이틀에 한 번 꼴로 줄어들게 되는 계절이 온 것이지요. 내가 근무하는 곳은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몇 도 가량 더 낮기 때문에 더 춥습니다. 오늘은 낮에 하늘이 흐리고 잠깐 비까지 흩뿌리는 바람에 좀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어요. 어쩐지 혹독한 겨울, 이라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만, 이건 내 지나친 엄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면, '혹독한'이라는 말처럼 어울리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시련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겪어야 하는 시련이란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 있을 몇 달 동안의 시간이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어쩌면 예전부터 내게 지속적으로 필요했던 건) 잠입니다. 한없이 풍족한 잠. 한없는 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절대 침묵의 세계. 하지만 늘 그렇듯, 한없는 잠을 갈구하면서도 자꾸 그것을 유예하려고 하는 이상한 심리 때문에 나는 늘 괴롭습니다. 늘 잠이 모자랍니다. 이것은 일종의 병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난치병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상한 심리를 어떻게 고쳐야 할 지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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