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문학동네, 2017.

시월의숲 2018. 7. 21. 23:21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는 까치소리처럼(적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 존재를 알리는 부지런한 작가 하루키의 신작을 읽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제목만 보고서는 내용을 예측하기가 어려운데(다른 작가의 책 제목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이번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 또한 그러하다. 무려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인데, 하루키 소설이 그렇듯 여전히 술술 잘 읽힌다. 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데아랄지, 이중 메타포라는 관념적인 단어 때문에 기존의 하루키 소설 하면 느껴지는 특유의 가벼움(?)이 날아가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 읽고 보니 딱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그냥 마리에나 멘시키같은 등장인물의 이름처럼 그냥 이데아이고 메타포인 것이다. 아, 어디까지나 나는 그렇게 읽었다는 뜻이다. 머리 아프게 이데아가 무엇이고, 이중 메타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떻게 그 단어들이 소설 속 이야기와 연계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글자 그대로 단순하고 명쾌하게 읽었다. 누군가는 기사단장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이데아에 대해서, 동굴 속으로 빠져들어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대해서, 이중 메타포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분석한 글을 쓸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 그 글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어디까지나 읽을 기회가 된다면 말이지만).


하루키의 소설을 말할 때, 그의 변함없는 변주 혹은 나쁘게 말해 자기복제를 이야기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자기복제가 아니라 조금씩 다른 변주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쨌거나 하루키의 소설이면 으레 등장하는 설정들, 판타지적인 설정, 모험, 두 개의 세계, 대립 혹은 화해 등이 이 소설에도 여전히 등장한다. 매번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루키만의 조리법으로 매번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는 실력은 과연 하루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매번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와 함께. 이번에 읽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두 개의 세계'라는 하루키의 트레이드 마크를 유감없이 드러낸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내 나름대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해변의 카프카>류의 소설일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처럼 좀 더 리얼리즘적인 작품이 아니라. 어쩌면 그 두 부류의 중간 지점에 속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전자가 비현실에 후자가 현실에 보다 치우쳐져 있다면,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 속 화자가 겪는 모험은 분명 비현실적이지만, 소설의 결론 부분에서 기사단장은 정말 있었다고(비현실을) 믿는 게 좋다는 화자의 확신에 찬 말이 그런 내 느낌을 더욱 확실하게 만든다.


엄청 버라이어티하고 극적인 모험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후반부에 주인공이 겪는 모험이 조금 안전(?)하다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건 내가 오래전에 읽은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 때문일지도 모른다(어쩌면 하루키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예전에 읽은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에서 주인공이 겪는 모험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주인공이 겪는 모험보다는 보다 역동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프롤로그에 나왔던 얼굴 없는 남자의 초상화 그리기도 성공을 했는지 언급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물론 성공을 했기에 주인공은 방황을 끝내고 다시 예전 부인과 함께 시작을 할 수 있었겠지만. 내가 이 소설을 보다 인상적으로 느꼈던 것은 소재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화자의 직업도 전문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미대 친구 아버지(유명한 화가)의 저택에서 지낼 수가 있었고, 일련의 사건에 휘말릴 수 있었으니까.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듣고 싶어 지거나, 가고 싶거나, 하고 싶어 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아마다 도모히코라는 화가의 산속 저택과 멘시키의 저택을 무척이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설에서 언급한 음악이나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면 충분히 듣거나 가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텐데, 소설 속 인물인 아마다 도모히코라는 화가의 저택은 허구의 장소이므로 가 볼 길이 없다는 게 다르다면 다를까. 어쩌면 그와 비슷한 장소를 모티브 삼아서 묘사한 곳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일본의 깊숙한 산속 어딘가에는 그와 같은 저택이 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와 비슷한 곳을 가게 된다면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이건 하루키 소설 속 아마다 도모히코의 저택과 비슷한데? 라고.


갑자기 내던져진 삶의 미스터리(급작스런 아내의 이혼 통보) 앞에서 주인공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되고(결혼 생활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러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저택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유명한 화가인 집주인의 미발표 유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욱 미스터리한 일을 겪게 된다. 여기서 하루키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 즉 꼬인 매듭은 어떻게든 풀어야 하고, 우리는 어딘가 손상된 채 삶을 계속 살아갈 수는 없으며,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를 흘려야만 한다'는 하루키식 문제의식과 맞닥드리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하루키식 문제의식 혹은 주제의 다양한 변주를 나름 즐기는 편이지만, 매번 어떤 문제를 풀어야만 하고, 모험을 해야 하며, '피를 흘려야만' 하는 식의 통과의례 같은 설정(물론 그것이 재미로 이어지긴 하지만)은 내게 약간의 거부감(?) 혹은 식상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왜 우리는 꼭 매듭을 풀어야만 하는가, 왜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가, 왜 피를 흘려야만 하는가, 하고 말이다. 손상되었으면 손상된 채로 그냥 아물게 놔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물론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선택은 늘 피를 흘리는 방향으로 흐르지만, 어쨌건 그것이 재미와 함께 감동을 준다면 나로서는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어딘가 손상된 채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피를 흘리더라도 진실을 아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모험을 하지 않고, 매듭을 풀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는 하루키의 소설이란 어떨까 궁금해진다. 너무 똑같거나 비슷한 어떤 것보다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는 것도 삶을 재밌게 사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는지. 아, 그나저나 나는 어떤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사단장을 죽이는 것일까 죽이지 않는 것일까? 기사단장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과연 찾아오기나 할까? 아니면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인가? 갑자기 이런저런 궁금증이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아직 읽지 않은 하루키의 <1Q84>를 읽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