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뱀과 물』, 문학동네, 2017.

시월의숲 2018. 2. 11. 16:50



"현실에서의 슬픔이 밤에 슬픈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꿈의 슬픔이 다른 슬픈 꿈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다른 말들은 다 차치하고,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평론가의 해설에서 그 문장만이 오롯이 내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그 문장이 이 소설에 대한 내 감상을 풀어내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문장으로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꿈의 슬픔이 다른 슬픈 꿈들을. 그게 언제인지, 어느 곳에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배수아의 인터뷰 혹은 블로그에 실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혹은 배수아가 했던 인터뷰 영상을 보았거나 팟캐스트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글, 영상 혹은 팟캐스트에서 배수아는 언젠가 환상동화 같은 것을 쓰고 싶다고 했다(어쩌면 그때 이미 구상중이었거나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의 여왕>이라는 동화를 모티브로 한 '눈 아이'가 나오는 환상 동화, 메르헨. 나는 그 말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고, 이번에 나온 <뱀과 물>이라는 소설집이 바로 그 '메르헨'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칠게 말해서, 이 책에 실린 모든 소설들이 어떤 소녀의 이야기이며, 그 소녀는 일곱 살까지는 남자로 살다가 그 이후가 되면 여자로 살게 되고, 자발적으로 떠났거나 혹은 잃어버리고, 알 수 없는 나라에 가 있는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물론 그 소녀들은 다 다른 소녀들이지만, 하나의 소녀에게서 흩어진 파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편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는 소녀와 소녀들. 책의 제일 마지막에 실린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소설들은 개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치 꿈이 그런 것처럼. 그것은 이야기라기보다는 꿈의 영상이며, 그것을 언어로 기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꿈은 전체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음울하고, 황폐하며, 스산하고, 때로 기괴하고, 한없이 음란한,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라는 연작소설집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꿈에 가까운 동화를 연상시켰다. 이 소설집을 감싸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나는 어디에서도 읽은 기억이 없다. 느껴본 적이 없다.


우리가 꿈을 해독할 필요가 없듯이, 이 소설들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느끼면 된다. 이상하다면 이상한대로, 불가해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꿈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그 꿈이 품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정조, 언어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아득한 꿈의 물결을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배수아의 이번 소설집을 읽는 하나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거대한 서사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드라마의 체험이 아니라, 그저 언어로 된 꿈을 읽는다는 것, 언어가 만들어내는 보다 원형적인 아름다움, 직관에 기반한 언어, 그 언어로 이루어진 배수아만의 음악, 산문정신, 환상동화, 주술적인 언어의 기묘한 느낌, 뭐 그런 것들을. 배수아는 어쩌면 이제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꿈을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사들은 요약되지 않고 끝없이 흩어지며 날아오른다. 사소한 특성이 반복해서 겹쳐지는 인물과 사건들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무언가에 불가항력적으로 붙들려 있는 꿈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불쑥 튀어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미래를 선취하고 있는 주술 같은 말들은 반복 속에서 리듬을 만들어내며 음악을 향해 간다. 배수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 꿈의 음악을 실재하는 음악에 비유한다면 어떤 절정의 구간도 허용하지 않는 무조음악일 것이다. 무조음악이 화성적인 기능관계를 해체시켜 하나의 지배음에 대한 다른 음의 종속관계를 부정하듯이, 배수아의 소설은 하나의 고정된 현실에 의해서 발생되는 꿈이라는 보조적 관계를 부정하며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현실에서의 슬픔이 밤에 슬픈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꿈의 슬픔이 다른 슬픈 꿈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현실과 꿈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배수아는 삶을 단순명쾌하게 정리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과 타인의 꿈 사이의 경계 역시 무너뜨림으로써 나와 타인을 나누려는 주체의 욕망에 제동을 건다. 배수아의 꿈은 주체가 현실에서 겪은 강렬한 사건들이 흔적을 남기는 프로이트적인 방식이 아니라, 삶에서 감정의 열도를 소거한 뒤 남는 잔상들의 원형을 찾아가는 바슐라르적인 방식으로 쓰인다. 프로이트가 구축한 무의식의 세계가 한 개인을 향해 몰입해 들어간다면, 바슐라르가 구축한 원형적 상징들은 인류 보편을 향해 넓어진다.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배수아는 이제 꿈의 세계를 통해 타인들과 육체 없이 뒤섞이기 시작했다.(271~273, 해설, '영원한 샤먼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