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시월의숲 2019. 3. 2. 18:53




내가 그의 글을 처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책을 통해 그의 글을 읽게 되었는지 말이다. 내 짐작으로는 아마도 다른 누군가의 책을 읽다가 그가 쓴 서평을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팟캐스트나 기타 다른 매체를 통해 그가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책을 읽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그가 강의한 인터넷의 문학강의를 결재해서 듣기까지 했다. 그는, 그의 글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무척 차분했으며 설득력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바로 구입하여 마치 영양제를 보충하듯 매일 조금씩 그의 글을 읽었다. 그의 글 어디선가 '산문시'의 경지에 다다른 책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산문시'의 경지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설명할 능력이 내겐 없지만, 나는 그의 산문들이 그에 조금이나마 근접했다고 느낀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산문집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갈무리할 능력이 내겐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타인의 고통(혹은 슬픔)을 공부(이해)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그 일을 그는 묵묵히 한다. 그 어려움에 대해서 그도 잘 알고 그의 책에도 언급하고 있지만, 도무지 타인의 고통(슬픔)이란 것은 내가 그와 똑같은 고통(슬픔)을 겪지 않고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그와 똑같은 고통(슬픔)을 겪었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타인의 고통(슬픔)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비극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면으로 딛고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나가야만 한다고, 그것이 문학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외침(이라기보다는 다짐에 더 가까운)은 희망적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비감에 더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변할 기회가 찾아올 경우조차 흔하지 않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일단 구제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타인에 대한 공감도, 폭력에 대한 감수성도 키워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일단 인간에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하며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에 대해 너무 비관적인 견해인가? 그는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고.


어찌되었든 그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다. 즉 실패를 포기하지 않을 용기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그를(그의 글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그가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왜 그의 글을 좋아하는지 깨달았으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