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구월의 마지막 날

시월의숲 2019. 9. 30. 23:51

구월의 마지막 날이다. 구월의 첫째 날은 일요일이었고, 구월의 마지막 날은 월요일이다. 구월의 둘째 날 내가 썼듯이, 구월의 마지막 날도 그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아마도 구월의 둘째 날이 오늘처럼 월요일이었기 때문일까. 마치 처음과 끝이 이어진 것처럼,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것처럼, 구월은 이어져 있고, 내 마음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어떤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하다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급기야는 그 말에 구속당하고 만다. 구월이 내겐 바로 그런 형국이다. 구월의 둘째 날 했던 그 말이 구월의 마지막 날까지 나를 옥죄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늘 몹시도 외롭고, 슬프고, 괴로웠다. 자존감은 온데간데 없고, 한없이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태양은 아직도 여름을 방불케할 만큼 뜨거웠고, 하늘은 청명했으며, 바람이 가끔씩 불었지만, 내 우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햇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저녁에 아버지 집에 들러 저녁을 먹는 동안 검은 우울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와 한 것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뿐인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는 동안 내 안에 어떤 우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나는 신나게 소리를 질렀으며, 아버지도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했다.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정말 싸우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서로 혈압 올리지 말자며 타협했고, 다시 웃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나는 우리 가족들의 대화가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범주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들만의 리듬이 잠재된 대화의 방식이 때론 내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줄 때가 있는 것 같다. 오늘이 바로 그랬다.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오늘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어떤 우울도 침범하지 못하는 놀라움을 경험했다. 그렇게 나는 살아있고, 아버지도 살아있으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살아있음을,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구월의 마지막날이 지나간다. 내일은 시월의 첫째 날이다. 드디어 시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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