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과거의 우리들과 현재의 우리들

시월의숲 2019. 10. 20. 21:04

이틀 연속으로 약속과 일이 있었으며, 술을 마셨다. 인간관계가 협소한 나로서는 약속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드물게 있는데, 어째 이번에는 연거푸 일이 있고, 약속이 있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물론 안 가도 되는 약속도 있었고, 반드시 술을 마셔야 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갑자기 와버린 듯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갑자기 단풍이 들고 가을이 와버린 것이다!

 

첫 번째 약속은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이었는데, 과거에 근무했던 직장 상사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었기에 그리 즐거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과하지 않게 술을 마시고, 과하지 않은 이야기와 과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나름 즐거웠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직장 상사들과의 모임은 나 자신의 발언보다는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어쨌든 그들은 내 선배들이고 그들이 삶을 먼저 살면서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때론 내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굳이 도움이 되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 혼자만의 삶, 나만의 생각에서 일정 부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같이 선배들이 가고 난 뒤 말문이라도 트인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약속은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대학교 때 만난 친구들과 계모임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데,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만나곤 한다. 이번에도 저번에 친구 돌잔치 때 짧게 만난 것이 아쉬워서 다시 한번 더 모인 것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은 주로 먹방 모임에 가깝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비싸서 못 먹거나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을 사 먹고는 하는데, 이번에는 안동에서 제일 비싸다는 소고기집에 가서 갈빗살을 먹었다. 술을 마실 사람은 술을 마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음료수를 마셨다. 우리들은 아무런 사회적 체면이나 예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편하게 먹고 마셨다. 우리들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늘 거기서 거기일지라도 우리들은 늘 새롭게(마치 처음 이야기를 꺼내듯이) 옛 추억을 말했으며, 늘 똑같은 부분에서 어김없이 웃고, 어김없이 분개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이름이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지고, 급기야는 내가 그를 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때로는 서로의 기억이 얽혀서 시간과 장소, 만났던 사람들이 뒤죽박죽 된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우리들은 다수의 기억에 의존하여 과거의 기억을 구성해보고는 했다. 과거의 우리들과 현재의 우리들. 우리들은 그렇게 가끔씩 만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자신들과 만나는 것 같았다. 마치 과거의 자신들과 대면이라도 하는 듯이.

 

일요일인 오늘은 아버지를 만났다. 이번 주에 지역축제를 한다고 며칠 전 아버지가 말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틀 연속 술자리로 심신이 피로했으나, 지역 축제도 구경하고 아버지도 볼 겸 집을 나섰다. 축제의 마지막 날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고, 축제 특유의 들뜬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공기 속을 맴도는 은은한 술냄새와 숯불고기 냄새 그리고 얼큰하게 취한 어르신들의 불그레한 얼굴에서 여기가 축제장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축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국밥을 먹었다. 바깥에서 먹는 국밥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활축제에 와서 활을 쏴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말했지만, 아버지는 모든 축제가 다 같지 않겠나, 어쩌면 축제란 사람 구경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국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내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그 부산스러움이 바로 축제의 묘미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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