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권정생 동화나라에서

시월의숲 2019. 10. 27. 20:51



의성 고운사에 갔다가 오는 길에 권정생 동화나라에 들렀다. 하지만 동화나라에 가기 위해 고운사에 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고운사에만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지나다보니 '권정생의 동화나라'라는 팻말이 보였고,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리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권정생 선생의 생가나 문학관 같은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 가까이 있는 문인을 한 번도 살펴보지 않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된 건 아무래도 최근에 읽었던 박준의 산문집의 영향이 크다. 그 책에서 작가는 권정생 선생의 유언을 소개하면서 그가 지금껏 보아왔던 유언 중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그리고는 글의 말미에 권정생 선생의 유언 일부를 옮겨 놓았다. 나는 그 유언을 읽고 전문을 찾아보았는데, 유언이라는 것이 이럴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아니다. 유언을 읽고 감탄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그것을 읽고 감동했다. 감동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권정생 선생의 동화나 소설, 시를 한 번도 읽지 않은 나에게 그의 삶, 그의 글, 그의 모든 것들을 마치 읽은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의아했고,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문학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그의 동화들보다 그의 삶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폐교를 활용하여 만든 '동화나라'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맞이하는 엄마까투리 인형을 지나 왼쪽 복도 벽면으로 그의 연보와 함께 삶과 문학에 대한 글이 붙어 있다. 그의 삶의 이력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을 읽으면서 그를 평생에 걸쳐 괴롭힌 병과 가난에 대해서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동화를 쓸 수 있었던 그 열정을 생각했다. 나아가 전쟁의 참화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의 의지까지. 그리고 그가 쓴 유언장을 다시 읽었다. 내가 읽은 것과는 다른 유언장도 하나 더 있었다. 이런저런 말이 많은 내 글과는 달리, 군더더기가 없고 누가봐도 그가 쓴 글임을 알 수 있는 그 유언을. 그 유언장에는 삶의 비극과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와 유머,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 유언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권정생 선생의 동시집 <삼베치마>와 장편소설인 <몽실 언니>를 샀다. 인터넷으로 사면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로 그곳에서 그의 책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삼베치마>와 <몽실 언니>를 좀 더 특별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방명록에 이름을 쓰면서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곳에서는 부디 아프지 마셔요.'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유언을 생각할 것이고, 그의 삶을 생각할 것이다.



- 2019. 10. 12. 권정생 동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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