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곳에서는 늘 물이 필요하다

시월의숲 2019. 12. 22. 17:35

뮤지컬 <스위니 토드>를 보았다. 오래 전 조니 뎁 주연의 영화 <스위니 토드>를 본 적이 있었지만, 주인공의 대략적인 캐릭터만 기억날 뿐 줄거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뮤지컬을 보면서도 마치 처음 보는 내용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영화와 뮤지컬은 다른 매체이고(관전의 포인트가 다르고), 오히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뮤지컬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학생은 이하는 관람하지 못할만큼 자극적인 소재의 뮤지컬이라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공연은 서울의 샤롯데 씨어터에서 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주말임에도 조금 일찍 일어나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의 서울행이었지만, 딱히 예전의 설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이제는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오히려 서울의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다. 특히 지하철을 통해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지하철로 이어지는 거대한 건물과 건물의 지하에서 수많은 쇼핑몰과 음식점,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치자 나는 간절하게도 바깥의 공기가 그리워졌다. 지하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들뜬 얼굴과 알 수 없는 기대들로 지하의 통로를 걸어다녔으나 나는 그곳이 마치 생명력이라고는 없는 건조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놓은 크리스마트 트리와 각종 캐릭터 인형들,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캐롤들, 코끝을 자극하는 달콤한 빵과 쿠키들, 지나치리만큼 많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아이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공연을 보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으므로(시간도 넉넉하지는 않았으므로) 지하철에서 내려 지하 통로와 통로에서 이어지는 거대한 건물들 내부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구경을 했다. 그곳에는 백화점이 있었고, 호텔이 있었으며, 각종 명품 매장들과 상점들도 있었고, 롯데타워와 어드벤처월드도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을 걸으며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 구경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고, 커피도 마셨다. 겨울이고, 바깥의 공기는 제법 찼으나,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투를 벗고 다녔고, 심지어 반팔로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뮤지컬은 재미있었다. 다른 뮤지컬에 비해 무대효과나 의상 등의 볼거리는 크게 없었고, 귀에 꽂히는 인상적인 넘버들도 없었지만(물론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과의 이중주는 좋았지만), 잔인하면서도 비극적인 스토리에 집중하면서 뮤지컬을 즐길 수 있었다. 두 시간 사십 분이 넘는 긴 공연시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던 건 모두 극 중 스위니 토드가 처한 상황과 그의 비극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으로 홍광호의 연기를 보았는데, 목소리가 무척 좋았고, 성량이 풍부하게 느껴졌다. 러빗 부인 역의 김지현도 옥주현과는 다른 매력과 목소리로 인상적인 러빗 부인을 연기했다. 블랙 코미디였지만, 서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강렬한 비극은 감정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뮤지컬을 보고, 지하철을 타고, 지하와 건물의 내부를 걷고, 그 속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또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올 때 본 어둠 속 거대하게 솟아서 번쩍이고 있는 롯데타워와 서울의 야경이 기억이 난다. 그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들, 기억나지 않는(기억할 수 없는) 익명의 얼굴들도. 거대한 자본주의의 도시. 너무나 거대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거대한 소비도시의 극히 미미한 부분을 잠시 구경하고 오니, 정신이 다 얼얼해지는건 당연하다 할밖에. 어쩌면 내가 서울에서 가장 필요한 건 물이 아닐까 싶다. 건조한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건 당연히 물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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