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시월의숲 2020. 6. 21. 18:16

경주에 있는 황리단길을 다녀왔다. 유명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가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그 규모가 커서 놀랐고, 주차할 때가 없어서 또 한 번 더 놀랐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젊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좁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마을은 당연하게도 찾아오는 사람들의 그 많은 차를 감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 동네를 몇 번이나 돌고 나서야 겨우 좁은 골목길에 주차할 공간을 찾아냈다. 주차하는데 온 기력을 쏟기도 했고, 날씨도 더워서 걷기가 힘들었으나 그래도 힘을 내어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말로만 듣던 황리단길은 사진 찍기 좋은, 작고 예쁜 가게들이 즐비하고, 먹을 것과 소소하게 살 것들이 많아서 제법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얼마전부터 지자체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도로명을 딴 마을 부흥사업의 여타 도시들과 별반 차이점은 없어보였지만, 경주라는 도시의 특성과 사업이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듯했다.

 

주요 도로가 있고, 사이사이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있었다. 마을 전체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서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다. 함께 간 조카들은 구운 치즈와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복고풍으로 꾸며진 '문방구'에 들러 오래 전 내 학창시절에 팔았던 불량식품들을 잔뜩 샀다. 요즘도 그런 제품들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불량식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재밌기도 했다. 걷다가 지칠 때쯤 카페에 들어가 팥빙수를 먹고 냉커피를 마셨다. 경주라는 도시답게 카페 2층 창밖으로는 커다란 무덤이 보였다. 우리들은 옛 왕족들의 무덤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혔다. 경주에 왔으니 뭐라도 하나 사고 싶어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개인 작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하나 샀고, 기념품 샆에 들러서 냉장고에 붙이는, 첨성대가 그려진 자석을 하나 샀다. 황리단길에서 이름난 빵집에 들러 빵을 몇 가지 사고, 작은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과 소설 한 권을 샀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서점이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쩌면 서점이라는 장소의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며 예쁘게 진열된 책들을 그저 구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을 읽는 사람이나, 책을 구경하는 사람, 책을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지 않은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딱히 책을 사겠다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니었지만, 진열해 놓은 책들을 보니, 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급기야 이 서점의 주인은 내 취향을 아는 것이 아닐까 하는(절대 그럴리가 없겠지만) 생각마저 들었다. 거기엔 내가 과거에 읽었던 책과, 앞으로 읽고 싶은 책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김연수가 추천사를 쓴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와 김민정의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나를 어떻게든 충족시켜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번 황리단길 방문을 내가 그곳에서 산 두 권의 책 제목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역사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무용한 도시의 골목을 거닐다', 쯤으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쓸모없어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도시'가 더 맞는 표현이리라. 그곳의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빛나듯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그 아름다움은 결국 저 이름모를 무덤의 주인처럼 언젠가는 덧없이 스러질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이런 느낌은 지극히 감상적인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경주라는 천년 도시가 품고 있는 생래적인 깨달음에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골목길을 걷을 때는 무척 더웠지만, 무덤 옆을 걷는 동안은 이상하게 서늘한 느낌이 들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곳의 숲과 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