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하루키식 자기 앞의 생

시월의숲 2020. 7. 11. 19:12

고작 일주일 하고도 3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깊은 동굴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꿈인가,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여전히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시커먼 동굴 속임을 확인하고는 절망에 빠지곤 했다. 어쩌면 동굴이 아니라 같은 장소를 계속 반복해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두웠으므로, 그곳이 동굴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를 가둔 지하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제는 7월부터 맡게 된 새로운 업무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어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누군가 조금만 툭 건드려도 픽, 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젠 피로가 회복되는 시간이 더뎌지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아침부터 내린 비 때문에 잔뜩 흐린 날씨와 어우러져, 오전 내내 몸과 마음을 내 의지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무중력의 대기 속을 누군가의 조작으로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고, 몸은 걷고 있는데 의식은 멈추어 있는 것만 같았다. 걷고 있으면, 그제서야 아, 내가 걷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그나마 오늘 늦게까지 잠을 자고 나니 피로가 좀 풀리는 듯하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기사단장을 죽이고 어느 순간 동굴 속을 걷게 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처럼 보이는 모호한 공간 속을. 이미 들어왔으므로, 그는 걸을 수밖에 없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있기나 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걷는다. 그것이 절망의 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의 길이 될 것인가.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 3의 길이 될 것인가. 그는 끝까지 걸었고(숨을 쉴 수 없는 압박감을 견디고), 결국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서 현실이 바뀌었는가? 그의 삶이 변하였는가? 아니, 현실은 엄연히 그의 앞에 커다랗고 시커먼 입을 벌린 채 놓여 있다. 바뀐 것은 현실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소설은 한 인간이 '자기 앞의 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앞에 놓인 현실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소설일 뿐인데! 누군가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그래, 결국 내 삶도 내가 쓰는 소설이 아니겠는가? 내게 지금 필요한 건, 그렇듯 약간의 위로와 용기다. 그걸 꼭 사람한테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나를 위로한 건, 언제나 내가 읽었던 책이었다. 오래 전에 읽어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떤 소설이, 문득 망각의 늪에서 튀어나와 한 조각 빛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이것이 고독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내가 그것으로 인해 위로받았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렇게 소소한 빛들로 인해 나는 또 부박한 내 삶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