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지붕 위의 소

시월의숲 2020. 8. 11. 23:47

지붕 위에 올라간 소들을 지상으로 내리기 위해 크레인이 동원되었다. 긴 줄에 매달린 소들은 허공에 잠시 띄워졌다가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어떤 소는 몸을 감았던 줄이 풀어져 목만 대롱대롱 매달린 채 허공에 떠 있어야 했다. 그 모습은 마치(물론 그것은 소를 살리기 위한 일이었지만) 교수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지상으로 내려온 소들은 네 발로 서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인지, 소들은 땅에 내려와서도 쓰러지듯 몸을 땅에 기댄 채 기운이 나기를 기다려야했다. 소들의 얼굴에는 지쳐보인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마치 영혼이 잠시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 서려있었다.

 

애초에 소들이 지붕 위에 올라간 이유도 폭우로 인해 급류에 휩쓸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물살에 휩쓸린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지상에 굳건히 네 발을 딛고 서 있던 소들이, 순식간에 차오른 물로 갑작스럽게 떠내려가다가 운좋게도 어떤 이의 지붕에 올라갈 수 있게 된 상황을? 참으로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서 본, 지붕 위에 있던 소들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그 표정을. 그건 生과 死를 넘나든 존재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을까.

 

'지붕 위의 소'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다리우스 미요라고 하는 20세기 프랑스 작곡가가 만든 <지붕 위의 소>라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과사전의 내용을 잠시 소개하자면, 처음에 다리우스 미요는<지붕 위의 소>의 전신 격인 <즐겁게 언제나 움직이며>라는 음악을 작곡했고, 이 곡이 찰리 채플린의 무성코미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를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영화감독이었던 장 콕토는 이 곡이 무대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바탕으로 판토마임 스타일의 초현실주의적인 소극의 대본을 썼는데, 미요는 콕토의 대본을 위해 바이올린과 피아노 편성을 관현악 편성으로 편곡했고 <지붕 위의 소>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우스 미요나 장 콕토 모두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라는데, 얼핏 미요의 <지붕 위의 소>와 홍수로 인해 실제로 지붕 위에 올라간 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다가도, 소가 지붕 위에 올라간 상황 자체가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 초현실적이 아니라 비현실적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요즘들어 겪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현실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않은가. 코로나도 그렇고, 끊이지 않는 이 비도 그렇고. 그렇게 우리는 초현실 혹은 비현실의 세계를 살고 있다. 

 

김연수의 오랜만의 장편소설인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고 있는데, 이런 문장이 나왔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이 문장을 위안 삼아도 되는 걸까. 이 혹독한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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