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태풍이 지나간 자리

시월의숲 2020. 9. 7. 21:52

태풍이 지나갔다. 다행히 내가 있는 이곳은 바람도, 비도 많이 내리지 않았다. 어제 숙직을 하여 오늘 오후에 일찍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에 있었던 오전 내내 머리가 멍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다음 주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번 주에 준비도 해야되고 정리도 해야했지만, 오늘 오후만큼은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었다.

 

그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서 집에 가기 전에 미장원에 들렀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 마트에 들러 장도 좀 봤다. 요즘 계속된 야근으로 인한 피로로 집에 가면 쓰러져 자기 바빴는데, 오늘 모처럼 장도 보고 머리도 자르니 기분전환이 되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내리던 비가 그치고 바람이 선선히 불어와서 피로가 조금이나마 씻겨나가는 듯했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 시간이 좀 남아서 잠시 산책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오롯이 혼자만의 산책이었다. 나는 무리하지 않고, 개천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한편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흠뻑 적셨고, 반대로 걸어가니 제법 힘찬 바람이 내 등을 밀어주었다. 비도 비지만, 강풍으로 인한 피해도 조심하라고 뉴스에서 강조하던 것이 생각났다. 이 바람이, 어느 곳에서는 나무를 쓰러뜨리고, 입간판을 날라가게 만들고, 돌담을 무너뜨리고, 고층건물의 유리창을 깨트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심지어는 사람을 다치게도, 혹은 죽게도 만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개천 주위로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강아지풀, 혹은 이름모를 들풀들이 강풍으로 인해 낮게 쓰러져 있었고,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 내 손목처럼 얇은 가로수들도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내가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이 바람이, 저 멀리서 누군가의 집을 망가뜨리고, 산사태를 일으키고, 트럭을 쓰러뜨린 그 바람이라니. 지붕 위의 소만큼이나 생경한 느낌이 들었지만, 바람을 원망할 수 있을까. 

 

인간들은 자연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자연을 정복하며 지금의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고, 그리하여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 말하기를 서슴치 않지만, 내 생각에, 진정한 정복자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 그 무엇도 아니요, 정복자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연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만큼 다시 인간들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들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감히, 그런 생각을.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고통과 한숨, 눈물 외에 다른 것은 없을까.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입간판과 돌담, 세상의 모든 건물들은, 개천의 들풀처럼 결코 몸을 눕힐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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