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시월의숲 2020. 9. 19. 23:26

나의 고조할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의 할머니 산소에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와 내 사촌동생들, 아버지의 형제들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추석이면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갔었다. 가는 길이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나와 사촌들은 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그저 가족들과 어딘가를 간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노랗게 익은 벼와 감나무, 대추나무를 보는 것이 좋았으며, 잠자리나 여치 등을 잡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갔지만, 산소까지 가려면 산을 올라가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아무런 불평없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산을 올랐다. 그때는 산이 무척 험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아버지와 함께 벌초를 하기 위해 다시 그 산에 올랐는데, 생각보다 쉽게, 빨리 도착해서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 어리둥절한 기분만큼 오랜시간이 흘렀다는 것이고, 그만큼 나도 컸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벌초를 했다. 아버지가 예초기를 메고 나는 낫을 들었다. 산소에 풀이 많지 않아서 일찍 마칠 수 있었다. 벌초를 한 후, 가져간 술과 마른 오징어를 놓고 절을 했다. 나는 술을 따르고 아버지는 그 술을 앞에 놓고 절을 했는데, 순간 오래전에 사촌들과 이곳에 와서 웃고 떠들었던 기억이 났다. 급기야 아이였을 때의 나와 내 사촌들이 마치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현재의 내가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 사촌들끼리 나란히 서서 절을 하던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많이 달라진 것인지.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때 있었던 내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얼굴도 모르는 나의 고조할머니 산소 앞에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렸다. 내 사촌들과 아버지의 형제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옆에서 절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아버지를.

 

할아버지의 할머니니까 아버지한테는 증조할머니가 되고 나한테는 고조할머니가 되는 거죠? 그렇지. 아버지는 증조할머니를 기억하세요? 아니,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 증조할머니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는거 아니겠니. 네, 그렇겠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도 있고, 아버지가 있기에 내가 있는 거겠죠. 그런 걸 뭐라고 해야할까. 피의 흐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잠시 아찔하면서 먼 과거로 소환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벌초대행을 하지 않고, 아픈 팔을 이끌고 직접 벌초를 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잔소리를 했더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죽으면 소용없다는 걸 잘 안다. 죽은 뒤에 누가 벌초를 했는지 어떻게 알겠니. 살아 있을 때 잘해야겠지. 물론 걱정해서 하는 말인거 잘 안다. 하지만 내가 힘이 닿는 한 벌초는 자식인 내가 스스로 해야하지 않겠니.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벌초를 하면 몸은 며칠 힘들지 몰라도 마음은 편하게 잘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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