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독서의 이유

시월의숲 2020. 10. 2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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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나갔다 왔는데, 추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겨울이 온 것 같다. 아직 단풍이 절정이 아닌 것 같은데. 올 가을은 늘 그랬듯, 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다. 속절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엽은 지고 있고, 산은 점차 울그락불그락 물들고 있다.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것이고, 내 보이지 않는 낙엽들도 무수히 떨어질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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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야근으로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문득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요즘말로 현실 자각 타임, 즉 현타가 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 사생활 사이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지고 있어서, 일을 하다가도 종종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죽기살기로 매진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지만,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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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편을 나누길 좋아하는 걸까?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왜 사회생활이 더 어려워지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사람들을 더 모르겠다. 특히나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거야'라고 단정을 짓는 사람과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 말은, 원래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다른 편이었구나,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네, 너희들끼리 잘 해봐, 라며 선을 긋는 것이 아니던가. 나도 한 때는 내 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그 누군가의 편도 아니고, 그 누군가의 편이 될 수도 없으며, 단지 내 편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그게 누군가에게는 이중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정말 나는 모르겠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시린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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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가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는 정말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고, 좋아하고, 누군가의 간섭과 사람들로부터 야기되는 감정의 소모가 없는 일. 오로지 나 자신만 그 책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 일.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는 일. 책을 읽는 일. 그것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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