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새해를 맞이하는 방식

시월의숲 2021. 1. 2. 22:38

늦잠이 유일한 낙이라는 건, 슬픈 일일까 아님 별 거 아닌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일까? 아무튼 나는 새해가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호기롭게 연휴동안 늦잠을 잤다. 잠을 늦게 자니 어쩔 수 없이 늦게 일어나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내 늦잠에는 필사적이면서도 정신적인 몸부림이 잠재되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피로를 풀어보겠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 같은 것 말이다. 늦게 일어나니 당연히 하루가 짧을 것이고, 별로 하는 일 없이 하루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으니 그게 아쉬워서 늦게까지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늦잠은 자고 싶은데, 일찍 자고 싶지는 않은 마음,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나는, 잠을 많이 자고 싶은게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늦잠'을 자고 싶은 것이다. 이러니 피로의 악순환 혹은 잠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잠을 자고 일어난 휴일의 시간들을 나는 좋아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오로지 나에게만 주어진 조용하고도 충만한 시간이다. 나는 마치 그것을 누군가에게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금은 설렌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휴일의 시간들이란 물론 일주일치의 빨래를 돌리고 집안을 청소해야만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일마저도 휴일이라는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과 나른함으로 인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뒤의 육상선수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결과가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 막 백 미터 트랙을 다 돌고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물론 육상 선수에게는 순위가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삶이란 그렇게 5일이라는 트랙을 돌고 토요일이라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채 계속 트랙을 돌고 돈다. 돌다가 잠시 쉬고, 쉬었다가 다시 돌고... 이 무한반복의 세계 속에서 어쩌면 질식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간에 숫자를 매기고, 하루를 만들고, 일주일을 만들고, 한 달을, 일 년을 만든 것이 아닐까? 또 그렇게 만들어놓은 숫자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 반복이라는 늪에서 순간이나마 깨어 있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미치지 않고 그나마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말이다. 아,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그런 것이라면, 원래 그런 식으로 살면 그만일텐데. 

 

왜 이런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는지 생각해보니, 2021년이라는 새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새해에도 별다른 다짐없이 그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새해 다짐이라는 것 자체가 유별나다 생각되기도 한다. 오늘 머리카락을 자르러 간 미장원에서 원장님이 새해인데 뭔가 다짐을 했냐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중에 불쑥 물었다. 나는 갑자기 허를 찔린 기분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뭇거리다가, 그냥 뭐 다짐이랄게 있나요, 새해를 맞이해서 머리를 자르러 온 거 밖에는...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원장님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일단 머리를 자르고 새해를 맞이하는 걸로. 나도 순간 같이 웃었는데, 웃고 나서 생각해보니 조금 무서웠다. 머리를 자르고 새해를 맞이한다니... 머리를 자르고... 아무튼 나는 새해를 맞이해서 머리(카락)을 잘랐고, 내 새해 다짐은 그렇게 잘린 머리(카락)처럼 깔끔해지는 거라고. 그게 내 새해 다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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