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문장

시월의숲 2021. 2. 12. 23:06

이런 글을 읽었다.

 

"떠나기 전, 유라는 나에게 일기장을 갖고 다니라고 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겠죠. 부산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일기장 따위는 갖고 다닌 기억이 없다. 일기란 가장 일그러진 형태의 노출증이라고 생각한다. 일기를 쓰는 행위에는, 그 내용이 아무리 비밀일지라도, 누군가 읽을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칠 줄 모르고 자신을 향내 내뱉는 소리나 혼잣말과는 다르다. 일기는 불완전한 상태의 자아가 그 순간에만 드러내는 최대치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360쪽, 안드레스 솔라노, '결국엔 우리 모두 호수에 던져진 돌이 되리라' 중에서 -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또 이런 문장도 읽었다.

 

"그날 밤 티엔은 편지를 썼다. 받을 사람 없었지만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 것들을 적었다."(420쪽, 이상우,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중에서 -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

오래 전 나는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안드레스 솔라노의 저 글을 읽으니 오래 전에 읽은 그 책의 제목이 생각났다. 책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 말이다. 소설 속 문장처럼, '일기란 가장 일그러진 형태의 노출증'일 지라도, '불완전한 상태의 자아가 그 순간에만 드러내는 최대치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라면 그것으로 너무나 충분하지 않은가?

 

 

*

우리는 받을 사람이 없더라도 편지를 쓰며,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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