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풍경처럼,

시월의숲 2021. 6. 10. 23:48

*

제가 당신을 풍경처럼 찍어드릴까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람도 풍경 속 하나의 사물처럼, 주위 풍경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도록 말입니다. 굳이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되려 어색함을 자아낼 뿐이죠. 우리는 모두 전문적인 모델이 아니잖아요? 어색한 표정으로 하나같이 똑같은 손가락 V자 혹은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암묵적이고도 사회적인 동의를 한 것처럼 사진을 찍을 때 다들 비슷한 포즈를 취하곤 하죠. 아, 물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치 모델처럼,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최적의 포즈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드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저와는 달리 그들은 무척이나 전문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마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이 현대인들의 일상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요? 저도 젊지 않느냐고요?

 

저는 나이와는 별개로 요즘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늙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물론 그리 젊은 나이라고도 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아무래도 디지털 세대가 아니라 아날로그 세대니까요. 저는 아날로그적인 것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제겐 사진을 필름카메라로 인화하던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아날로그적인 감성과는 별개로 나 자신이 사진에 찍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간혹 직장에서 단체사진을 찍거나 여행지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참 난감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렇게 찍힌 사진 속의 나는 늘 필요 이상으로 경직되어 있거나, 눈을 감고, 입모양이 비뚤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의 나를 보는 것은 내겐 어떤 의미에선 고통입니다. 

 

누구나 다 본인의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단점만을 찾아내며, 그렇게 찾아낸 단점만을 크게 부각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원판불변의 법칙 운운하며 우스갯소리를 던질지도 모르지요. 글쎄요, 그럴지도. 하지만 저는 사진 속 내 모습이 생각보다 못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고 있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럽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진은 따로 있습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이 아니라, 내가 찍히는 줄도 모르게 찍힌 사진, 뒷모습이 찍힌 사진에 매력을 느낍니다. 부지불식간에 찍힌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분명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옆모습이 저랬나? 내 뒷모습은 저런 느낌을 주는구나, 하며 놀랍니다. 나는 나를 본체와 그림자처럼 분리할 수 없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 속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와 완벽하게 분리됩니다. 나는 나를 마치 제삼자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기묘한 경험이 아닙니까.

 

카톡 프로필 사진에 본인 얼굴 사진을 올리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어! 라고 말했던 어떤 이가 떠오릅니다. 그건 좀 극단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그 말을 듣고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왜 내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리는가. 나는 왜 나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힘들어하는가. 나는 왜 내 모습에서 고통을 느끼는가. 그것은 어쩌면 내가 사진 속의 내 모습을 싫어하는 이유와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진 속 경직된 내 모습이 싫은데, 하물며 그것을 공개한다니요? 그것은 적어도 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든 경직되었든, 못 생겼든 잘 생겼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는 의미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의 흐름을 이어가다 보니 맨 처음에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에서 다소 멀어진 듯 느껴집니다. 당신을 풍경처럼 찍어드릴까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람도 풍경 속 하나의 사물처럼, 주위 풍경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도록 말입니다. 저는 그런 사진이 좋습니다. 내가 나임을 드러내지 않고 주위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사진을. 그럴 때의 나는 아마도 그리 경직된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자연스럽게 웃거나 입을 삐죽거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풍경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어디에 가든, 어디에 있든 그 자리의, 그곳의 풍경 속에 젖어들 수 있기를. 저는 늘 그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

우리들은 오랜만에 소백산에 오르는 길이었다. 다들 무리하지는 말고, 굳이 비로봉이나 연화봉까지 올라갈 의무감을 가질 필요 없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만큼 올라갔다 오기로 했다. 산길은 무리 지어 갈 수 없고, 오르다 보면 자연스레 무리가 흩어지게 되어있었으므로. 그곳에서 나는 풍경 사진을 몇 컷 찍었다. 그리고는 앞서 가던 동료에게 물었다. 사진을 찍어 드릴까요? 그가 말했다. 아니요, 저는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 그럼 풍경처럼 찍어드릴까요?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것도 없이, 풍경이 주인공이 되는 사진 말입니다. 그는 그저 소리 없이 웃기만 했고,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풍경처럼 찍는 것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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