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국민서평프로젝트라는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썼던 글의 원본이다. 그러니까 분량에 맞춰 내용을 잘라내기 전의 글이다.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더 있는 거 같아서, 저장해둔다는 의미로 여기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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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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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에 대해서. 그 순간들은 마치 이 소설을 통해 전이되어 점차 증폭되는 듯 느껴졌으므로.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몸에 약간의 통증이 감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목이 뻐근한 것뿐이라고, 늘 그랬듯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목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통증은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무게도 없는 보통의 그림자와는 달리 둔중함이 느껴지는, 마치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실체감이 있는 그림자였어요. 목의 통증은 점점 심해져서 책의 삼분의 이 정도 읽었을 때는 고개를 들거나 숙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책을 얼굴 쪽으로 당겨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이 아프니 어깨도 아프고, 허리까지 아픈 거 같아서 책 읽기를 잠시 중단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이 늘 그랬듯 이번 소설도 자꾸만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주인공 경하와 인선이 느끼는 고통이 마치 내게 전이된 것 같은 느낌에 시시각각 사로잡혀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이 몸의 고통쯤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 사건이라는 소재의 무게를 한강은 어찌 감당하고 있는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소재의 무게감 때문에 어쩌면 내가 더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화자인 경하가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 외딴집에 새를 구하러 가는 여정으로 시작합니다. 경하는 작가이고 인선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목수입니다. 인선은 제주도가 고향이고 자신의 부모님과 외삼촌 등이 4·3 사건의 피해자였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은 인선의 아픈 가족사를 들여다보며 대학살의 역사를 다시 조망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평가하거나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파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의 뼈에 새겨진 고통을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그 들여다봄이 그냥 피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듯,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그 진실에 가 닿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죽고 나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하는 우여곡절 끝에 인선의 제주도 외딴집에 도착하지만 폭설로 고립되고, 정전이 되어 밀려들어오는 어둠과 추위를 겨우 촛불 하나로 버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경하 자신이 앓고 있는 몸의 고통과 가슴속 유서를 생각하며 그 순간 그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때 인선이 거짓말처럼 나타납니다. 인선은 서울의 병원에서 손가락 봉합수술을 받고 침대에 누워있을 텐데 어떻게? 이 폭설과 어둠을 뚫고, 차도 다니지 않는 이 시간에 지금 자신과 함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정영 인선인가 아니면 인선의 혼인가? 혼만 살짝 빠져나와 홀로 고립되어 있는 자신에게 온 것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경하는 묻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소설 속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무너집니다. 경하는 제주도 4·3 사건이 일어난 마을에 있는 인선의 집에서 인선을 통해 이미 돌아가신 인선의 어머니와 그 가족들을 만납니다.
저는 이 부분, 그러니까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마치 위령제를 보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한강이 제주도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이 소설 자체가 그러한 위령제의 한 형태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들을 위로하는 일이 자칫 피상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텐데, 이 소설은 그러한 위험을 피해 갑니다. 제게는 이 소설을 읽는 것 자체가 고통과 대면하는 일이었고,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었으니까요(실제로 내 몸의 통증이 이 소설로 인해 더욱 악화된 것처럼 느껴졌으니).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인선이 경하에게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인선이 자신의 학창 시절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바탕 가출 소동을 벌이고 집에 들어왔을 때, 가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어머니가 오직 그 눈에 대해서 말을 하던 장면. 수십 년 전 어머니의 가족들이 그 사건으로 인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고 당신과 당신의 언니는 심부름으로 요행히 목숨을 건진 날, 열일곱의 언니와 함께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다니던 그날. 열일곱의 언니는, 내가 시신 위에 덮인 흰 눈을 닦을 테니 너는 두 눈을 부릅뜨고 가족들이 맞는지 잘 보라고 말하던 그날, 어머니가 보았던, 시신들 위에 내려앉아 녹지 않던 하얀 눈.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던 어머니.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 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차갑고 차가워서 눈이 내려앉아도 녹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던 장면이.
한강은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하긴, 타인의 고통에 우리는 얼마나 가 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아니면, 사랑하지 않으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전언은, 일종의 선언이자, 다짐 혹은 주문이 아닐까요. 책의 뒤표지에 신형철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 것들과는 결코 작별하지 않고 작별해서도 안 되며, 작별할 수도 없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기억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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