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교행(交行)

시월의숲 2022. 1. 7. 14:55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 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 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 류인서, '교행(交行)' 전문(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수록)

 

 

 

*

이 시를 읽고 있으니, 밤기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아마도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질이 나쁜 외투를 입고 목의 옷깃을 잔뜩 끌어올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드문드문 불이 켜진 민가가 보였지만 대부분은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기차가 터널에 통과할 때면 마치 어둠과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느껴졌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을 때, 창밖으로 희끗한 것들이 날렸다. 눈이 내리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의 기억들은 혼재되고 순서들은 뒤섞이고 때로 착각 혹은 환영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농락하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이 그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탄 기차가 다른 기차와 스쳐 지나가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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