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기억의 소수자들

시월의숲 2020. 3. 19. 22:33

불을 끄고 화장실을 나와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다

새 책을 꺼내 읽으려고 펼치는데
밑줄이 그어져 있다

버리려고 쓰레기통에 던져둔 메모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유령이 사는 걸까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된다
나는 천천히 인정해야 했다
망각이 사는 걸까

망각은 쓰레기처럼 제외될 뿐이지만
쌓이고 쌓인 기억의 지하실이다

날아온 화살도 없는데 불쑥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부르지도 않는데 노을을 따라나선 것도
바람이 불었을 뿐인데 다리가 풀려버린 것도

그대도 잊고 그리움만 남듯이
망각은 쌓여 늪이 되어 더는 비워버릴 수 없다
권위는 역전된다
잊혀진 의미들
기억의 소수자들
기억의 권위에서 버려진 것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 백무산,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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