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칼과 칸나꽃

시월의숲 2021. 12. 15. 23:37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 최정례, '칼과 칸나꽃' 전문, <레바논 감정>, 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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