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 최정례, '칼과 칸나꽃' 전문, <레바논 감정>, 문학과지성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