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잃어버린 볼펜을 찾아서

시월의숲 2022. 1. 26. 23:40

그는 또 볼펜이 없어졌다고 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없어졌다고 말했다. 

 

분명히 여기 놔둔 거 같은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사라진 볼펜들의 세계가 있다. 볼펜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통해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멀쩡히 잘 쓰던 볼펜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그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들고 다니다가 어딘가 놔두고 왔던지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빠뜨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부주의한 성격을 탓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라진 볼펜들은 볼펜들의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가 잘 잃어버리는 우산은 우산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순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볼펜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고, 우산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던 그 볼펜, 그 우산이 맞는 걸까? 그 세계에 한 번 들어갔다가 온 것들은 이미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이건 그리 기발한 상상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하루키적' 상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 이면의 또 다른 현실(비현실 혹은 초현실?)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데 탁월한 작가가 아니던가. 내 이런 상상이 정말 하루키의 소설에서 읽은 건지 아니면 하루키적인 상상일 뿐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혼자 웃었다. 마치 세상의 비밀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지긋한 눈길로 손에 쥐고 있는 펜을 들여다본다. 거기엔 '모나미 플러스펜 3000'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내 책상 위 연필꽂이엔 그것과 똑같은 펜이 대여섯 개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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