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세상 최초의 아침

시월의숲 2022. 6. 20. 20:31

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따스한 흰빛 속으로 창백하게 스며드는 이 분홍빛은, 지금껏 단 한번도 서쪽의 집들을 향해서 비춘 적이 없었다. 집들의 유리창은 무수한 눈동자가 되어, 점점 떠오르는 햇빛과 함께 퍼져가는 침묵을 지켜본다. 이런 시간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이런 빛도 없었으며, 지금 이러한 내 존재도 아직 한번도 없었다. 내일 있게 될 것은 오늘과 다를 것이며, 오늘과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내일 내가 보는 것을 자신 속에 담아낼 것이다.(185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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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를 읽다보면 때로 그 의외성에 놀랄 때가 있다. 그의 불안, 체념, 상실, 고통, 모순, 불가해한 모든 것들이 결코 절망에만 닿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다. 위 문장들은 익숙한 것들을 타파하는, 새로움에 관한 긍정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최초의 아침'에 대한 새로운 기대 혹은 희망에의 예감으로 충만하다. 그는 결코 비관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의 글을 오독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결코 희망에의 예감이 아니라 매 순간의 인식에 대한 페소아식의 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가?

 

어쩌면 페소아는 단정할 수 없는 '어떤 인식' 혹은 '어떤 상태'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름들을 탄생시키고, 그 이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살게 한 페소아가 아닌가. 그러니 한없이 비관적인 페소아도, 한없이 낙관적이거나 천진한 페소아도, 한없이 허무주의적이며, 한없이 냉소적인, 그러면서 또 비밀스러운 예감으로 가득한 페소아도 모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글에 그리 놀랄 일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읽고있는 페소아는 이 세상 최초의 페소아다... 내일 읽게 될 것은 오늘과 다를 것이며, 오늘과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내일 읽는 것을 자신 속에 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