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는

시월의숲 2023. 9. 10. 00:22

여름이 도래하면 나는 슬퍼진다. 원래는 한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이 환하게 비치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안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로 생각하고 느끼는 내 감각의 영원히 묻히지 못한 시신들과, 외부에서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넘쳐나는 삶들 간의 대비가 너무도 날카롭다. 이것은 우주라고 알려진 국경 없는 조국에서, 비록 내가 직접 탄압을 받는 건 아니지만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아래 살아가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된다.(769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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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가 슬퍼한 여름이 이제 가려한다.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아래 살아가는 느낌'의 여름이. 아직까지 한낮의 태양은 뜨겁지만 예전만큼의 위세는 아니다. 여름을 슬퍼한 페소아와는 달리 뜨거운 여름을 닮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자신도 말했듯, 페소아와 여름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을 혹은 겨울이 페소아의 계절이라고 말하기에도 망설여진다. 그것은 가을과 겨울이 페소아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어느 계절과도 '어울린다'는 말을 사용하기가 꺼려지는 탓이다.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 아닐까? 아니, 아무것도 아닌 계절일지도.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는' 그 어디에도 없는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