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바다출판사, 2018.

시월의숲 2022. 8. 7. 21:48

우리는 모두 자기 뇌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 그로 인한 자기중심주의는 모든 인간의 기본 설정이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한계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12쪽, '엮고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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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이 으레 그렇듯 이것은 정체를 파악하기는 엄청나게 어렵고 원인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한 듯하다. 그 결과란, 내가 네이디어 호에서―특히 밤에, 배의 놀이 활동과 안심과 즐거운 소음이 다 그친 뒤에―절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워낙 남용되어 이제 진부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지한 단어이고, 나는 지금 이 단어를 진지한 의미로 쓰고 있다. 내게 절망이란 다음 두 가지의 혼합을 뜻하는 말이다. 죽음에 대한 이상한 갈망, 그리고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에서 비롯한 죽음에 대한 공포.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이 불안이나 고뇌라고 말하는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같지 않다. 최소한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27~28쪽, 「재밌다고는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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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서른세 살이다. 세월이 벌써 한참 흘렀고, 매일 점점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매일매일 무엇이 좋고 중요하고 재미있는가에 대해서 여러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가능성이 차단된 다른 선택들의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차츰 깨닫고 있다. 세월이 점점 더 빠르게 흐를수록 선택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지고 박탈된 선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결국 내 인생은 평생 풍성하고 복잡하게 가지 쳐온 나뭇가지의 한 지점에 다다를 텐데, 그 지점에서 내 삶은 그 하나의 경로로 제한될테고 이후에는 세월이 나를 정체와 위축과 부패의 단계로 몰아넣을 것이며 그러다 결국 나는 최후의 구조의 기회마저 놓치고 그동안의 모든 싸움이 허무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시간에 익사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나를 그렇게 가두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선택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조금이라도 어른답게 살고 싶다면, 나는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하고 그로 인한 박탈을 애석해하면서도 그것을 감수하고 살아가야만 한다.(37~38쪽, 「재밌다고는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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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안 한 때는 언제였는가?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안 한 때가 언제였는지 안다. 내가 굳이 이것저것 선택할 필요 없이 모든 욕구가 외부로부터 충족되었던 때, 내가 욕구를 말할 필요도 없고 인식조차 못했던 때. 그때도 나는 액체에 떠 있었고, 그 액체 또한 짭짤했으며, 따뜻했겠지만 지나치게 따뜻하진 않았다. 그때 내게 의식이란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었다면 나는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정말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너도 여기 함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엽서를 써 보냈을 것이다.(38~39쪽, 「재밌다고는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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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생들과 카프카를 강독할 때 극심한 좌절을 느끼는 것은, 카프카가 웃기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웃김이 이야기의 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왜 관련되는가 하면, 물론, 위대한 단편과 위대한 농담은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174쪽, 「카프카의 웃김에 관한 몇 마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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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의 심리학은 우리가 카프카를 가르칠 때 겪는 문제를 일부 설명해줍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농담을 설명하는 것만큼 농담에 담긴 마법을 더 잘 빼앗는 방법은 없지요.(175쪽, 「카프카의 웃김에 관한 몇 마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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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카프카의 농담에서 진정한 핵심을 음미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핵심이란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아를 구축하고자 지독하게 분투한 결과는 그 지독한 분투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성을 지닌 자아라는 것. 우리가 집을 행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여정을 밟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집이라는 것.(180쪽, 「카프카의 웃김에 관한 몇 마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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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서평은 보통 시장 논리에 따른다. 서평은 암묵적으로 독자에게 구매자의 역할을 맡긴다. 수사적인 측면에서 서평은 너무 무신경하기에 아무도 대놓고는 묻지 않는 질문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그 질문이란 '당신은 이 책을 사겠습니까?'이다.(186쪽,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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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에 대한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 전문가가 된 사람보다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진실된 애정에서 전문가가 된 사람을 더 좋아하고 더 믿는 경향이 있다.(277쪽,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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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 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 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 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313쪽, 「랍스터를 생각해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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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송아지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랍스터, 기타 등등을 잘 조리하고 잘 꾸며서 내놓은 요리를 즐기는 《고메》독자들이여, 여러분은 이 문제에 관련된 동물들의 (아마도 자격이 있는) 도덕적 지위와 (아마도 틀림없이 겪는) 고통에 관해서 많이 생각하는지? 생각한다면, 그로부터 어떤 윤리적 결론을 도출했기에 스스로에게 그냥 동물의 살을 먹는 것도 아니고 동물의 살을 쓴 세련된 진수성찬을 즐겨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는지(미의식의 핵심은 당연히 단순한 섭취가 아니라 세련된 즐거움이니까?) 그렇지 않고 당신은 이런 혼란에든 확신에든 개의치 않고 앞의 이야기 같은 것은 쓸데없는 사색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이런 생각을 그냥 제쳐놓아도 좋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당신 내면의 근거는 무엇인지? 달리 말해, 당신이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고서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인지? 만일 후자라면, 왜 생각하기 싫은지? 대충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생각하기를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나는 지금 누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진심으로 궁금하다.(334~335쪽, 「랍스터를 생각해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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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경쟁 스포츠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스포츠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표현되는 무대다. 그 관계는 용기와 전쟁의 관계와 대충 비슷하다.(376~377쪽,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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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고, 그것도 여러 행태로 전염된다. 그리고 힘과 공격성이 아름다움 앞에서 취약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감을 느끼고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407쪽,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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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신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면, 인간은 또한 부정할 수 없고 중요한 그 진실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데 기꺼이 몰두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여기서 위험한 점은, 오락이 점점 더 효과적으로, 더 널리, 더 유혹적으로 그 진실을 부정하는 환경에서는 우리가 결국 그 부정이 무엇에 대한 부정인지를 잊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점이다. 우리가 만약 죽는 법을 잊는다면, 결국 사는 법도 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427~428쪽, 「픽션의 미래와 현격하게 젊은 작가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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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여러 사건과 변화로 구성되고 최소한 시작과 중간이 있어서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자기 인생을 이해한다. 우리는 시공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내재된 속성이다.(429쪽, 「픽션의 미래와 현격하게 젊은 작가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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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의 최대 매력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관심을 잡아둔다는 점이다. 시청자는 자극을 계속 겪으면서도 쉴 수 있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 이 점은 오로지 지속적 관심과 후원만을 목표로 삼는 모든 저급한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429쪽, 「픽션의 미래와 현격하게 젊은 작가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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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이너는 우리의 기분을 전환해주고, 흥미를 끌고, 가끔은 위로도 해준다. 그러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예술가뿐이다. 현대의 쓰레기 작가들은 말하자면 예술가의 구역에서 활동하는 엔터테이너들이다.(430쪽, 「픽션의 미래와 현격하게 젊은 작가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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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처음에 글쓰기를 통해서 벗어나고 싶었거나 가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부분, 바로 그 재미없는 부분을 직면함으로써 이제 글쓰기의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일종의 기적이다. 그리고 이것에 비한다면,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460쪽, 「재미의 본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