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황정은, 《백百의 그림자》, 창비, 2022.

시월의숲 2022. 8. 21. 18:39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10쪽)

 

 

*

 

 

무재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무재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새삼스럽게 무재씨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조금 키가 커서 내 눈높이보다 한뼘 반 정도 위쪽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었다. 평소엔 좀 헝클어진 듯 부풀어 있던 머리털이 빗물에 젖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교씨,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말아요.(12~13쪽)

 

 

*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고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18쪽)

 

 

*

 

 

죽나요.

죽어요.

그렇게 간단하게.

간단하게 죽기도 하는 거예요, 사람은.

······내 그림자도 그토록 위협적인 것일까요?

글쎄요,라고 말하는 무재씨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걸으며 나는 말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무재씨, 죽는 걸까요, 간단하게.

따라가지 말아요. 

무재씨가 문득 나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21~22쪽)

 

 

*

 

 

그게 무서운 거지, 그림자가 당기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다보면 왠지 홀가분하고, 맹하니 좋거든, 좋아서 자꾸 따라가다가 당하는 거야, 사람이 자꾸 맥을 놓고 있다보면 맹추가 되니까, 가장 맹추일 때를 노려 덮치는 거야(34쪽)

 

 

*

 

 

무재씨, 나는 가마는 그냥 가마라고 생각했지 거기에 모양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인가요.

무슨 말이에요?

해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40~41쪽)

 

 

*

 

 

마뜨료슈까는요,라고 무재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카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왔어요.(155~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