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슬픔에의 예감

시월의숲 2022. 9. 6. 23:20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들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그저 무심히, 평범하게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불현듯 생생히 떠오를 때가 있다. 한때 나와 함께 숨을 쉬며 내 곁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여겨지던 사람들은 모두 사소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기억으로 내게 남겨졌다.

 

그들과 함께 했던 많은 추억들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은 그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집을 나설 때, 우연히 뒤돌아본 풍경 속에 나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지만 '우연히' 각인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짐짓 아닌 척 하지만, 나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때, 뒤돌아 본 풍경 속의 그의 모습이 내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차마 그것을 발설하기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슬픔보다 슬픔에의 예감에 몸을 떨며 이를 꽉 깨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억이란 때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하고, 슬픔에의 예감은 정작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얄궂은 기억법과 슬픔에의 예감 같은 것들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아마도 지난 주말 벌초를 하러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다녀왔기 때문이리라.

 

저 멀리서 거대한 짐승이 몸을 뒤척이는 듯한 바람의 수런거림과 벌초를 하는 내내 코끝을 떠나지 않았던 풀내음과 마당에서 보았던 새끼 뱀과 산소에서 보았던 개구리와 수많은 벌레들. 어떤 예감들로 충만했던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오래전 기억들이 떠오른 것은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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