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이름을 버지니아 울프 때문에 알게 되었다. 아니,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버지니아 울프만 알고 있었던 내게, 울프의 소설 『올랜도』의 실존 인물이었다고 하는 비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었다.
이 소설은 역자가 말한 것처럼 '남편과 사별하고 자기만의 평온을 찾아 나선 여든여덟 살 노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레이디 슬레인은 총독 부인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모든 열정이 다하고 난 뒤에 찾아온 그것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녀는 그동안 총독의 아내로서, 자식들의 어머니로써, 남들의 시선에 부합하는 행동과 말만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세속적인 가치에 물든 자식들은 그런 어머니의 변화를 탐탁지 않게 보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그 순간에라도, 아니 그렇게 때문에 더욱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작가의 물 흐르듯 유려한 문장에 일단 놀랐다. 얼핏 울프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가도 비타 고유의 아름다움이랄까, 품위가 있었다. 내가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소설을 썼던 당시 비타의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이 소설을 노년에 이른 작가가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년의 심리상태를 어찌 이렇듯 생생하게 그려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소설가의 능력이란 그런 것인가?
나는 그에 대한 답(이라면 답이고,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을 이어서 읽은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란 산문을 읽다가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경험은 상상력을 제한한다. 노문학자인 김수환 선생은 내게 여행이나 실제 경험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진짜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이상으로 상정한 1세계의 실제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상한 유토피아에 실제로 작용했던 (그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해 낸) 저곳의 상상계이기 때문이에요."
이게 내가 놀라움을 느낀 부분을 정확히 설명해 준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만약 소설가가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면 그의 세계는 얼마나 협소할 것인가! 경험이란 그것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기능은 할지 몰라도 그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 또한 백 퍼센트 맞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인 우리들은 그저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 느끼는 수밖에는.
이상한 일은, 이 소설을 읽고 울프의 소설이 더욱 읽고 싶어 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책이냐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올랜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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