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시월의숲 2023. 7. 30. 22:27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95쪽,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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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지돈을 읽게 된 것은 배수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배수아가 번역한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때문에. 그의 첫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의 맨 처음에 실린 소설의 제목이 「눈먼 부엉이」였고, 이것은 앞서 말한 사데크 헤다야트의 동명 소설과 제목이 같을 뿐만 아니라 소설 속 소재가 바로 그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까맣게 생각나지 않는다. 정지돈의 그 소설은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의 소설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혼란스러웠던 그의 첫 소설집을 뒤로한 채 한동안 그의 책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또다시 그의 책으로 이끈 것인가? 이번에는 물론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다. 

 

거의 잊고 있었던 그의 이름을 이 산문집을 통해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어쩐지 그를 다시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산문집만큼은 그의 첫 소설집만큼 혼란스럽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거의 맞았다. '거의'라고 표현한 것은,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나서도 그의 문체를 100퍼센트 즐길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이건 익숙함의 문제일까. 아직은 내가 그의 화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자유분방한 사고, 지적 호기심, 그리고 그가 언급하거나 인용한 수많은 책들을 별다른 부담 없이 즐기지 않았던가!

 

그렇다. 나는 이 책을 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소설을 읽었을 때만큼의 혼란스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꽤 유쾌한 사람이고,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면서 무척이나 진중한 사람이며, 걷는 것을 좋아하고(당연히 이 책은 걷기와 사색에 대한 책이므로), 무엇보다 걸으면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제목,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라는 문장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한다면(어쩌면 결정적일지도 모를) 이 책의 표지(녹음이 짙은 거대한 나무 아래 사람들이 두세 명씩 앉아 있는 풍경)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쩌면 표지만으로 이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언어로 나를 사로잡았으리라. 내가 깨닫지 못한 어느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