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시월의숲 2023. 7. 13. 21:21

높은 곳에서 새벽의 M시를 내려다본다면, 형광등의 창백한 빛에 둘러싸인 편의점은 네모난 모양의 부표처럼 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안전하면서도 풍요로운 영역이 있다는 걸 알리는 부표인 셈이다. 실제로 새벽의 편의점 안에서 바라보는 문밖의 어둠은 물결처럼 일렁이곤 했고, 어둠을 가로질러 담배나 생수를 사러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 조해진, '산책자의 행복' 중에서(소설집 《빛의 호위》 수록)

 

 

*

편의점만 가면 늘 필요한 물건만 빨리 골라서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삼각김밥과 음료를 계산한 뒤 물건을 손에 들기도 전에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들었기 때문일까. '편의점에서 길을 잃다' 같은 제목의 소설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편의점에 대한 명상은 어쩌면 새삼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에 편의점을 통해 현대인을 사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핏 고독이나 얼굴 없는 목소리 같은 것이 떠오르는데, 조해진의 저 소설 속 문장들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가 들리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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