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농담

시월의숲 2023. 7. 24. 23:43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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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그 부분을 읽고 며칠 뒤에 밀란 쿤데라가 별세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는 오래전에 읽은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제 사놓았는지 모를, 아직 읽지 않은 그의 『농담』을 새삼스레 꺼냈다.

 

이제 정말 『농담』을 읽어야 할 때인가, 생각하며 책의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불현듯 '우연만이 어떤 계시로 보여졌고', 내가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러자 ― 그의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농담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