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강렬한 경험은 오래도록 - 어쩌면 영원히 -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문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남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짓고 (싫든 좋든) 이끌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 사람의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원형(原形)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실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거창하게 한 것 같다. 나는 그저 오래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서스페리아》의 한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 《페노미나》가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나는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 프로그램에서 《페노미나》를 보았던 것이다.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보니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 - 불길하게 흔들리는 검은 숲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마에게 쫓기는 소녀와 징그러운 벌레들이 -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공포스러움마저 기억이 났다.
영화 속 제니퍼 코넬리는 어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연기의 어설픔이나 시나리오의 빈약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지금에서야 가능한 일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연기나 스토리의 개연성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각적인 효과가 주는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 그 이외의 것들은 생각나지 않았고, 생각할 수 없었다. 불길함, 음산함, 긴장감, 징그러움, 공포스러움 같은 감정들만이 커다란 블랙홀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영화를 보고 한동안 밤에 잘 걸어 다닐 수 없었다. 어둠이 내린 숲, 특히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스산하게 흔들리는 길을 걸을 때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집으로 뛰어들었다. 이 영화가 내게 공포의 원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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