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애프터썬

시월의숲 2023. 5. 29. 16:05

 
이것은 사람의 뒷모습에 관한 영화가 아닌가? 함박웃음을 지은채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고,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찍은 행복한 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 찍힌 어떤 이의 뒷모습과도 같은 그런 영화. 뒷모습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표정을, 회상의 형식으로 들춰보는 영화였다. 
 
캠코더에 찍힌 아버지의 영상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얼핏 30대 초반의 아버지(캘럼)와 11살 딸(소피)의 잔잔한 여행기로 보인다.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녀의 여행에 특별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어느덧 성인이 된 딸의 회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성인이 된 딸이 아련하고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찍었던 캠코더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 현재라면, 영화의 대부분은 11살의 딸이 아버지와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듀나의 말을 빌리자면, "거의 보이지 않는 현재가 지금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과거에 절묘한 화음을 제공해 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주인공(소피)의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그의 행동으로 심리상태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여행 내내 필사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가 왜 그렇게 슬퍼하고, 생각에 잠기고, 자신의 고향에서 적응하지 못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엇이 그를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인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딸 소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소피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우리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딸은 왜 아버지와 찍었던 영상을 그토록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알지 못하는 상태'가 잔잔했던 영화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상이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분위기, 전조, 예감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거기서 불길하거나, 슬프거나, 비극적인 어떤 것들을 상상한다.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유행가 가사 같은 그 문장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는 느낌이었다. 제발 그 예감이 틀린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하지만 짓궂게도 영화는 그 예감의 진위를 속 시원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진 필사적이고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딸로 대변되는 우리는 딸이 그러했듯, 지난 추억들을 복기하면서 겨우 아버지를 안아줄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뿐.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이 얼핏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와는 많은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든 떠나간 사람(영화에서는 그마저도 알 수 없지만, 강력하게 짐작되는)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몸부림친다는 면에서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인간 내면의 몸부림에 관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실제로 영화 중간중간에 캘럼의 춤추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무언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이지 않는가?). 아버지 캘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필사적인 몸부림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딸 소피의 몸부림. 그리하여 결국에는 몸부림치는 한 사람의 등 뒤에서 그를 살포시 안아주는 일이 이 영화가 끝내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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