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 누군가 이 책을 원서로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누군가의 서평을 읽었을 때도 그저 무덤덤했다. 그저 재미 교포 2세가 쓴 일본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그러다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흥미가 생겼다. 예고편을 보았고, 드라마에 나온 배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터뷰와 드라마의 원작 소설가인 이민진의 여러 인터뷰까지 보게 된 것이다. 예고편으로 본 드라마의 영상미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이민진이라는 작가의 인터뷰가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무려 '가족'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책에 서명할 때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라고 쓰곤 합니다. 저와 친척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사람들에게 말이죠. 저는 '우리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저의 철학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예요.
- 이민진, '다큐인사이트' 중에서
그리하여 읽게 된 이 소설은, 무려 4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이자, 거대한 역사 속에 휘말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거기서 어떻게든 살아남거나 혹은 처절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독립투사 같은 걸출한 사람들이 아닌 지극히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차별과 멸시에 대한 이야기이자 결국 생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도 살고자 일본이라는 침략국에 갔으나 고국으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이중 삼중의 멸시와 차별을 당하던, 재일 교포들의 이야기라니. 나는 그동안 그 사람들을 그린 소설을 읽거나 다큐 등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우리는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인상적인 첫 문장처럼, 이 소설은 끝까지 잘 읽혔고 무척 재미있었다. 인상적인 인물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중에서 선자의 첫 번째 아들인 노아의 일생이 마음에 남았다. 드라마에서는 이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는 걸로 봐서 각색을 하면서 아예 없앤 것으로 보이는데(드라마 전개 상 없어도 상관없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걸까?) 내가 보기엔 중요한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 그의 삶과 결단이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인간이기에 노아처럼 고뇌할 수 있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고, 죽음까지 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고지식해 보이기까지 하는 신념 때문에 그는 그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작가는 그런 인물과 함께 그의 동생인 모자수의 삶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라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이 있을까. 대의를 위해 몸을 바친 삶은 물론 고결하고 추앙받을만하다. 하지만 그 외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삶을 겨우 살아가는 것만이 전부인 사람들의 삶은 그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 보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짜임새 있는 소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4대 걸친 이야기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인물들 간의 에피소드가 좀 더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전달 수준에 그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소설이라는 게(특히 서사 위주의 장편의 경우) 사람의 감정을 깊이 파고 들어오는 묵직한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 부분이 내심 아쉬웠지만, 이건 내가 그동안 이런 서사 위주의 긴 장편 소설을 오랫동안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내가 그 부분을 읽어내지 못하는 건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오랜만에 긴 장편을 읽었다.
새삼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소설이 그려내는 인간 군상에 대해서. 그것이 소설이 지닌 하나의 유효한 기능이라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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