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3. 1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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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깨질 것처럼, 지붕을 뚫을 것처럼 그렇게 격정적인 비가 아니라, 얼핏 보면 오는지도 모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울음을 참고 있는,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 같은, 그런 비에 대하여.(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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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근길의 느낌은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내가 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차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교체한 타이어의 문제는 아닐 테고... 오늘 내리는 비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성분이라도 들어 있었던 걸까?(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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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데 맥주를 한 잔 마시니 피곤이 두 배로 밀려오면서 몸을 가누지를 못하겠다. 자면 그만이지만 지금 시간에 자는 건 왠지 억울하고... 그저 몽롱한 상태로 앉아 있다.(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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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봐주기를 바라고 남긴 메모지만 누가 보는지 알 수 없고, 사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더라도 상관없는 그런 메모에 대하여.(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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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내내 옅은 밤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온통 회색빛이다. 모든 사물들의 윤곽이 흐릿하다. 모든 것들이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다. 그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나 자신까지 흐릿해진 것 같다. 허공을 짚으며 휘청이고, 어딘가에 자꾸만 부딪친다.(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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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는 생각조차 나지 않던 목도리를 일주일 내내 두르고 다녔다. 2월은 2월만이 가진 특유의 추위가 있다.(20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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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조금이라도 긴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일까, 쓰지 않게 된 것일까? 뭐, 아무렴 어떠냐마는.(20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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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자 어떤 꿈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지, 왜 어떤 꿈들은 생생히 기억나는데 반해 어떤 꿈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까. 하긴, 불쾌한 꿈은 기억나지 않는 게 더 낫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의 찌꺼기, 앙금 같은 것들은 서서히 가라앉는 부유물처럼, 먹구름처럼 한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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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의무감에 마셔야 하는 일은 참으로 곤혹스럽고 그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내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했고, 어떤 이는 조금의 배려나 주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을 했다. 그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최선이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나는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지 않았고, 그래서 괴로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오늘 술자리에서 확실히 깨달은 바는, 누구와 마시느냐가 술자리의 즐거움을 판가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싫은 사람과 마셔야만 한다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든지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사람을 영영 싫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가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 취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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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 밖을 나왔는데, 목덜미를 파고드는 매서운 칼바람에 깜짝 놀랐다. 걸음이 두 배로 빨라졌다.(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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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보존하는 길은 그냥 자연 그대로 놓아두는 일인 것 같다. 일단 인간의 손길, 발길이 닿으면 자연은 망가진다. 시간의 문제일 뿐. 자연의 유일한 적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닐까.(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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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무겁고 미약한 두통도 있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흐렸고, 비가 흩뿌렸고, 새초롬하게 추웠고, 우중충했으며, 퇴근길에는 급기야 서글프기까지 했다. 날씨 탓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만, 날씨 탓이 아니라고 하지도 못할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집에 왔으니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밥을 먹어야겠다. 일터에서의 번잡스러움은 잊자. 우중충한 날씨도 잊자. 안식과 탄식의 밤이 도래하였으니.(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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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무슨 정신으로, 무슨 힘으로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문득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다. 과거의 어느 날 나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림자, 그늘,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면, 그것은 진짜 눈물이 아니라 눈물의 기억일 뿐이라는 생각이.(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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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오열, 격분, 폭로... 인터넷 뉴스 기사 제목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화들짝 놀라서 읽어보면 별 거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저런 단어들이 등장해도 놀라지 않는다. 둔감해지는 것이다. 언어의 힘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닌가. 정말로 파격적으로 오열하고 격분하고 싶은데 말이다.(202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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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과 나는, 우리는 왜 매일 힘을 내야 하는 걸까. 힘내는 거 힘들어. 힘내는 거 너무 지겹다.

 

-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중 동은(송혜교)의 대사

 

봄은 잔인한 계절이라기보다는 힘든 계절이로구나. 여러모로. 힘내는 거 힘든데. 지겹고.(202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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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보내줄 때가 온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전원을 켜도 부팅이 잘 되지 않더니 최근엔 더 심해졌다. 컴맹인 나로서는 고쳐볼 엄두를 내지 못하겠고, 굳이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컴퓨터를 언제 샀던가? 최소 십 년 이상은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기분이 어째 좀 이상하다.(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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