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3. 1. 23:38

*

'이월의 첫날, 봄비처럼 겨울비 내린다,라고 쓰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겨울에 내리는 비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라고, 2013년 2월 1일에 나는 썼다. 오늘은 2024년 2월 1일이다. 곧 있으면 2월 2일이 되겠지. 매 순간이 '작별들 순간들'이다.(20240201)

 

 

*

내 무심함으로 인해 모든 일들이 망가져 가는 것을, 나는 그저 허허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다.(20240203)

 

 

*

요즘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확실히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느낀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붕괴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 삶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20240203)

 

 

*

길을 가다가 '황해도 이북만신 작두 타는 박수무당'이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PR은 '신'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토록 많은 신들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20240204)

 

 

*

그들에게 ‘기형도’는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시간이고 공간이며 텍스트다. ‘기형도’ 안에 거주하면서 ‘기형도’와 하나가 되려고 몸부림치다가 또 다른 ‘기형도’가 돼 분화한다.

 

- 하린, <청춘:완벽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는> 중에서

 

그런데 어찌 그들뿐이랴. 우리에게 청춘의 시절은 찰나일지 모르나 그 불안은 현재진행형이지 않은가. 나는 때로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은 불안에 빠질 때면 기형도를 읽는다. 불안은 전이되고, 증폭되지만 그 속의 묘한 비애가 알 수 없는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암울하다 할지라도.(20240205)

 

 

*

어제가 입춘이었구나. 늘 고개를 들고 다니지만 어느새 바뀌어 있는 세상에 여전히 놀란다. 하지만 그 변화가 예전만큼 극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 더 놀란다.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내일 아침 영하의 날씨에 도로가 얼어붙으니 주의하라는 재난문자를 받았으나, 그리 놀랍지 않았다.(20240205)

 

 

*

어떤 기억들이 남고 어떤 기억들이 사라지는가. 불현듯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 장면들만이 또렷이 기억날 때가 있다. 기억하고자 애썼던 순간들이 없었기 때문일까. 때로 기억의 주인이 나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20240207)

 

 

*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명절 때만 되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이 기분.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이 기분.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그래, 며칠만이다, 며칠만... 주문을 외우게 되는. 그리하여 나는 이 시기만 되면 '서서히,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20240209)

 

 

*

마음을 내려놓는 일은 참으로 어렵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참았다. 길었던 연휴의 끝이로구나.(20240212)

 

 

*

핸드폰에 담긴 사진들을 쭉 훑어본다. 가장 최근 것들부터 점차 과거의 것들까지. 과거 사진들 속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다. 대부분의 사진 속 나는 눈을 감고 있거나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무슨 말을 하려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랜만에 예전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20240213)

 

 

*

노골적인 드러냄보다는 은근한 것, 품고 있는 것, 아닌 척하는 것에 더 매료된다. 하지만 때로 노골적인 것의 발칙함 혹은 솔직함에 끌리기도 한다. 뒤라스의 <연인>을 다섯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얘기는,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의 얘기다. 메콩 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중에서(20240216)

 

 

*

입을 틀어막고, 온몸을 결박당한 채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마치 내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항의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이 말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야만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가지 않았던가?(20240217)

 

 

*

대체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하지만,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나와 엮일 가능성이 낮은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해봤자 상대방은 기억조차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마음속에 후회의 싹이 트면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러나저러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저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무엇 때문에 아무도 관심 없는 내 개인사를 허공에 대고 지껄이고 있단 말인가!(20240217)

 

 

*

시간이 휘두르는 낫에 자기를 지킬 방법이란 없지

자손뿐, 시간이 그댈 데려갈 때 맞서줄 이는 그뿐.

 

- 셰익스피어 소네트 12, 신형철 옮김

 

자손을 낳는 것을 불멸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나'는 사라지고 내 자식이 나를 잇는다고? 나의 무엇을? 그것이 불멸이라고? 글쎄, 그것은 불멸하고픈 인간들이 만들어낸 자기기만의 표현은 아닌가. 셰익스피어 자신도 말했듯, 시간이 휘두르는 낫에 자기를 지킬 방법이란 없는 것이다.(20240218)

'입속의검은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들  (0) 2024.04.01
단상들  (0) 2024.03.13
단상들  (1) 2024.02.03
단상들  (2) 2024.01.15
단상들  (0)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