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는 빗방울이 전선에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그러니 정말 흥미있는 이야기는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되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그가 전선의 빗방울을 보기 전까지이다.
- 한강, 「어느 날 그는」 중에서(『내 여자의 열매』 수록)
오래전에 읽은 『내 여자의 열매』 속 여덟 개의 소설 중에 지금 기억하는 건, 맨 처음 실린 「어느 날 그는」의 첫 문단이다. 저 문장은 마치 마법처럼 그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쫓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기억이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 그 소설집을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읽는다. 하지만 그 사실이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쁘다. 새롭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읽는 소설과는 다른, '한 번 읽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소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읽는 일'은 엄연히 다를 것이므로. 누군가 그랬다.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만나는 타인이라고. 나는 그 말을, 그 타인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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