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침묵의 뿌리

시월의숲 2024. 10. 17. 23:20

숲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하다. 새소리, 매미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낙엽 부서지는 소리, 갈대 흔들리는 소리… 숲은 온갖 소리들의 향연으로 쉴 새 없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고요함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숲의 소리는 침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숲에 어둠이 내리면, 숲은 거대한 하나의 동물이 된다. 숲의 어둠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나를 응시한다. 어둠은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들고 소리 또한 선명하게 만든다. 낮의 숲과 밤의 숲이 다르듯, 낮의 소리와 밤의 소리 또한 다르다.
 
호젓한 숲길을 혼자서 걷는다. 온갖 소리들로 가득한 어둑한 숲길을. 거대한 동물의 긴 호흡을 듣는다. 그 침묵의 뿌리를 만진다.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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