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중(雨中) 산책

시월의숲 2024. 9. 21. 22:11

 

 

雨中 산책.

 

발도 아직 덜 낫고, 비도 오고 해서 산책은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버지의 전화와, 요즘 들어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보고자 우산을 쓰고 산책을 다녀왔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가리러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우중 산책은 처음이던가? 산책은 늘 맑거나 어두울 때 했던 기억만 있으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쓰고 걸었던 것 말고 오롯이 산책을 위해 우산을 쓰고 나갔던 기억은 없으니(내 기억은 늘 정확하지 않다).

 

우중 산책은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마침 덥고 습하던 여름의 기운이 한풀 꺾여서 제법 시원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아직 발의 통증이 완벽히 사라지지 않아서 조금 절뚝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비도 오고 저녁 시간이어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깅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놀랐다.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그는 모자를 쓴 채 열심히 내 옆을 뛰어서 지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진정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날씨를 가리지 않는구나.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단순해지자 생각했다. 건강을 위한 운동도 가벼운 산책으로 시작하자고.

 

어쩌면 독서와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유명하다는 이유로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으면 한 페이지도 다 못 읽고 나가떨어지지 않는가. 처음에는 만화로, 관심 있는 주제로, 가볍고 쉬운 책으로 시작하면 된다. 나에게 스스로 핑계를 부여하지 말고, 일단 뭐든지 하면 된다고. 그런 생각을 했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무 쉬운 이야기  (2) 2024.10.18
침묵의 뿌리  (2) 2024.10.17
새벽은 새벽을 기억하고, 낮은 낮을, 밤은 밤을 기억할 뿐  (0) 2024.09.21
정류장에서  (3) 2024.09.18
오래된 묘지  (0) 2024.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