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듀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2022.

시월의숲 2025. 1. 2. 23:39

수많은 영화는 편견의 범죄 증거입니다. 앞으로 여러 번 이야기할 텐데, 실제 세계와 이를 투영한 동시대 영화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돕니다. 이를 제대로 읽으려면 여러 시대, 여러 공간의 실제 작품을 보면서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어요. 간접 정보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결국 남의 눈이고 남의 생각이니까요. 오독하고 실수하더라도 일단은 직접 보는 수밖에.(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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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영화는 지난 1세기 넘게 쌓아온 영화사의 끄트머리일 뿐입니다. 지금의 영화만 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영화적 체험이 과거의 영화들 속에 있습니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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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경험은 그냥 빈약해요. 이건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걸작만 보시나요? 그러고 싶으신가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옛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까다로워집니다. 세월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들은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럴 리가요. 모든 경험은 어느 정도 잡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한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봐야 자신의 경험을 통제할 수 있지요. 그리고 형편없는 영화, 평범한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중요한 경험입니다. 전 과거의 평범한 영화들을 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종종 이들의 역사적 데이터로서의 가치는 걸작보다 더 큽니다.

이 책은 걸작들의 리스트가 아닙니다. 대신 전 옛날 영화들을 보는 관객들이 얼마나 다양한 영화를 만나고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어요. 그중에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도,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경험도 있습니다. 모험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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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두뇌는 경험 안에 게으르게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는 진짜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상당수는 아주 당연하기 짝이 없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 자체를 거부할 것이며, 20년쯤 뒤엔 지금 그런 상태였다는 사실 자체에 놀랄 것입니다. 운이 좋다면 말이죠. 운이 나쁘면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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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예술적 시도는 종종 성공한 시도보다 더 재미있으니까요.(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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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가 다양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 반영하지 않는 매체의 역사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와 과거의 작품들을 공부할 때 반드시 그 비정상적인 결핍을 보아야 합니다. 그 결핍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린 영화 교과서를 지배하는 위대한 백인 영화 감독의 위대한 영화들을 역사적 맥락 안에서 제대로 이해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린 창작자들의 위대함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창작자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나온 훌륭한 작품들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창작자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창작자는 자신의 성공작보다는 언제난 못한 사람들이지요.(11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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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대상은 원래 다 비슷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인종에 속한 사람들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바흐와 비발디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고전 추리소석들은 다 비슷비슷한 내용입니다. 이 비슷비슷한 것들에서 개성과 매력을 찾아내고 즐기는 것이 덕질의 즐거움이지요. 처음 보았을 때는 쉽게 구별하기 어려웠던 멤버들이 다 다른 외모와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은 아이돌 팬들이 늘 거치는 순서입니다. 물론 보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강렬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심지어 연예인이라고 해도요.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한 번 보고 나면 잊힐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그 평범함이 우리 삶에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하지는 않지요. 어차피 우리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개성을 알아봅니다. 

그러니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대상의 개성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삶을 갉아먹는 외모 기준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은 그냥 다른 이야기예요.(113~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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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은 모두 불완전하고 이상하며, 다들 미래 후손들의 가혹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이어지는 건 망각의 단두대고요. 우린 잊히기 전까지 너무 놀림당하지 않길 바랄 뿐이지요.(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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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고 이야기의 통제권을 쥐고 아무 거리낌 없이 욕망과 생각을 터트리고 그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난장판 안에서 가능한 모든 조합을 찾으며 최대한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요.(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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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를 통한 영화 감상은 아무래도 패키지 관광과 비슷하니까요. 물론 이런 도전 대부분은 실망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모험의 끝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게 모험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되나요.(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