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시월의숲 2025. 1. 5. 22:49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중에서
 
 
김민정 시인의 이 시집을 언제 샀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이 시집을 경주의 황리단길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인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시기에 나는 이 시집을 샀고, 핑크색의 이 시집은 내 책상 위에 몇 년인지도 모를 시간 동안 내내 놓여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면 시 한 편씩 혹은 기분 내키면 몇 편씩을 읽고는 다시 덮어두기를 반복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읽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읽었기 때문에 꽂아놓은 책갈피가 별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읽을 때마다 책갈피 앞에 있던 시들 역시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면 읽었던 시들을 다시 읽었고, 어떨 때는 그냥 책갈피 뒤의 시들을 읽어나갔다. 시가 잘 읽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그렇다고 술술 읽혔던가?). 그러니까 시가 특별히 난해하다거나 읽기 어려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내게 시란 소설처럼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었다. 시 한 편, 한 편이 내겐 커다란 문 혹은 벽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단편소설처럼 단숨에 읽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게 시란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겨우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다른 말로 시란 곧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김민정의 시는 처음이었다. 일상에 바탕을 둔 그의 솔직함, 발칙함, 유머러스함에 놀라기도 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며, 크게 웃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느껴지는 삶의 비애랄까 모순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 슬프게 다가왔다. 이 시집의 제목처럼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웃음 뒤에 느껴지는 쓴 맛에 마음이 이상하게 아렸다. 하지만 시인은 씩씩하다. 씩씩함이 이 시인 혹은 이 시집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쓸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순간순간의 장면과 생각과 느낌들 속으로 우리를 밀어놓고, 어, 이건 이런 게 아니었어? 라며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인도 재밌고, 독자도 재밌어지는 지점이다. 하지만 끝내 살짝 눈물 한 방울이. 아, 이건 내가 너무 감상적이기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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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지난 블로그를 뒤져보니, 내가 이 시집을 2020년에 샀다. 5년 전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5년이라는 세월도 그리 오래된 느낌은 아니다. 이상하지. 시간관념은 늘 뒤죽박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