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제목의 물음은 책의 유행을 지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보인다. 아니, 그것은 시대를 떠나 늘 물어야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이 유행할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뉴스를 틀면 정치인 혹은 언론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앞다투어 정의를 내뱉었고, 그것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들었던 정의에 대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정의'라는 말이 오염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염된 정의라니! 우리는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의 유행을 지나 지금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가 화두인 것 같다. 그것은 지난 12월 3일 계엄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 역시 깊은 충격을 받았고, 새삼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자마자 민주주의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회, 결사의 자유가 있고, 선거를 치르고, 대의제를 따르는 등의 행위들이 민주주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찮았다. 과연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가 비상사태나 전시도 아닌데 계엄을 발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내가 가입해 있던 글쓰기 모임에서 올해 모임의 주제로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모임의 첫 번째로 선택된 책이 바로 EBS 다큐프라임 제작진이 만든 《민주주의》였다. '세계적인 석학들의 민주주의 강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책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다가가는 입문서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큰 무리 없이 쉽고 설득력 있게 읽혔고, 중간중간 세계적인 석학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 것도 좋았다. 아쉬운 점이라면, 무려 스물네 명의 석학들의 인터뷰가 무척이나 짧게, 맛보기 정도로만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한 명 한 명이 여러 권의 저서를 낼 만큼 유명한 사람들이니, 그들의 말을 한 권의 책 안에 다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책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통해 다른 책으로 건너가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아쉬운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이 책의 내용이 아쉬웠다는 말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만난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른 책에는 어떻게 구현되어 있을지, 어떻게 심화되고 혹은 비판되고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기대감을 빨리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고 할까.
이 책은 자체로 민주주의에 대한 개론서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책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시대에 만연한 여러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의 순기능을 믿는 책이었다. 민주주의에서 갈등은 왜 중요한지,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의 시대(노골적인 욕망의 시대랄까)에 민주주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해야만 하는지), 기업과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누군가는 이 책에서 말하는 민주주의가 너무 나이브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이브하다면 나이브한, 민주주의를 긍정하고 민주주의 안에서 민주주의로서 불평등을 해소할 수도 있음을 견지하는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시작이다. 일단 시작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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