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이제 나는 햇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월의숲 2025. 5. 8.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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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빛과 실》을 읽고 있다. 내 방에서도 읽고 산책을 하면서도 읽는다. 책의 두께가 얇아 아쉽지만 들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책에는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이 실려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난 후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최초 제목이 '새가 돌아온 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득 《소년이 온다》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어린 새'였다는 걸 떠올린다. 책에는 작가가 여덟 살에 쓴 시도 실려 있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여덟 살의 작가가 쓴 시처럼, 모든 게 금실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도.(202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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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정원 일기'를 읽는다. 그가 북향 정원에 심었다는 식물이 미스김라일락, 불두화, 옥잠화와 호스터 그리고 맥문동이었다. 낯선 이름에 궁금증이 일어 식물들을 검색해 본다. 많이 본 것도 있었고 생소한 것도 있었다. 북향이기에 햇빛이 적어 그는 거울을 반사해 정원에 빛을 주기로 한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다. 거울의 각도를 매 번 조정하며, 빛이 정원에 도달하도록, 식물에 빛이 스며들도록 신경을 쓰면서. 빛이 '있는' 정원을 위해 빛을 '주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썼다.
 
'이 일이 나의 형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지난 삼 년 동안 서서히 감각해왔다. 이 작은 장소의 온화함이 침묵하며 나를 안아주는 동안, 매일, 매 순간, 매 계절의 변화하는 빛의 리듬으로.'(202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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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의 짧은 산책길에 소담하게 피어있는 불두화를 보았다. 한강 작가의 책이 아니었다면 그저 수국인가, 하고 말았을. 같이 걷던 동료가 먼저 불두화네,라고 말해서, 나는 혹시 한강의 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는데,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불두화라는 말이 생소하여 몇 번이고 되뇌었다. 부처님 머리를 닮은 꽃, 불두화, 불두화.(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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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 정원'이란 에세이가 있다.
 
'햇빛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정원을 갖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자신이 살았던 북향 방과 공동주택에서의 햇빛이란 '불완전한 방문을 반복하는 손님 같은 존재'였을 뿐이라는 것. 이어서 그는 썼다.
 
'이제 나는 햇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북향 정원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북향 정원은 그에게 그저 햇빛을 보다 물질적 혹은 시각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뿐, 그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둠이 있다고, 어둠을 보는 눈이 있다고, 그러니까 '검은 사슴'이 있다고. 어둠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비로소 빛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어둠을 깊고 집요하게 응시한 자야말로 빛이 있는 쪽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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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도 있다.
 
이상하지 않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
 
두렵지 않아?
결코 통과한 적 없는 시공간의 겹들이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것('소리(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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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 깊은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은 그 영화의 자기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듯, 책도 마찬가지다. 한강을 읽으면 한동안 세상은 한강스럽고, 배수아를 읽으면 배수아스러워진다. 페소아를 읽으면 세상이 온통 페소아가 되고, 리스펙토르를 읽으면 리스펙토르가, 베른하르트를 읽으면 베른하르트가, 제발트를 읽으면 제발트가 된다. 나는 지금 한강을 읽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한강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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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써야 할까.
 
나는 책을 읽고 난 후에도 계속 이 책을 생각했으며, 무언가를 계속 적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에 대한 내 독후감이 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이 가장 인상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물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글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지막에 실려 있는 북향 정원에 대한 글과 정원을 가꾸면서 쓴 일기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빛이란 것이,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줄 수도 있는 것임을. 나 역시 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빛 속의 어둠과 어둠 속의 빛, 그 불그스름한 저녁과 푸르스름한 새벽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