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민주주의와 같다. 그것은 하나의 이견이다. 뭔가를 제안하든 반박하든 책은 차이를 표방한다. 따라서 책을 쓰는 일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한다.(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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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변치 않는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일 것이다. 비판이란,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일 때조차, 민주주의자의 의무에 가까운 특권이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사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때,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와 대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 진리에 기댐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의심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표하지 않던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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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는 확실히 다른 정체들에서는 볼 수 없는 원리상의 난점들이 있다. 가령 민주주의에서 데모스는 통치자이자 피치자이다. 즉 다스리는 사람들이 또한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나 법규는 그들이 만든 것이고 다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복종은 그들의 자유가 결정한 것이다. 지배자인 데모스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데모스 자신이다. 즉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치자, 자유와 복종, 주체와 객체가 한 존재에게 동시에 머무는 매우 역설적인 체제인 것이다.(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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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는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심지어 숫자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민주화 투쟁이란 그런 근거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거 없이, 자격이나 조건 없이, 우리와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들과 공동의 삶을 위한 교섭을 벌어야만 한다. 이 교섭은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기존의 식별 가능한 도덕이나 정치 또는 법적 지대를 넘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척도를 공유한 자들이 이익의 균형점을 맞추기 위해 벌이는 교섭이 아니라, 척도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와 더 이상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과 교섭을 벌여여야 한다.(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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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야말로 대중을 지배하는 통념이나 척도에 대한 비판이자 차별화이며, 데모스야말로 개인을 넘어선 연대의 이름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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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수적인 '다수'로 모든 걸 결정하는 정체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민주주의 이념이란 기껏해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통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경우 통념에 맞선 소수적 투쟁이야말로 민주화 투쟁에 합당한 이름이지, 다수 의견을 이유로 그것을 제압하는 게 민주주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어느 논자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핵심이 "정당들이 득표를 위해 투표자 다수의 관심이나 선호에 반응하는 노력"에 있다면, 소수자들은 아마도 그런 민주주의에 의해 폭력적 배제를 경험할 것이다.(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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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민=주권'의 완성은 매우 독특한 면을 지녔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전체로서는 막강한 권력이 만들어진 과정이지만, 동시에 한없이 나약한 개인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개인들이 철저히 발가벗겨지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체로는 절대 권력을 가졌고 개별적으로는 매우 나약한 인민. 우리가 민주주의라 믿는 인민주권 체제는 인민(국민)이라는 이름의 절대권력이 한없이 나약한 개별 인민을 다루는(양육하든 통제하든)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주권자라는 점에서 아무도 개별적으로는 주권자가 아닌 체제. 왕의 두 신체(주권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처럼 인민도 두 신체를 가졌다. 주권자로서 인민은 참으로 신성하고 전능하지만 개별적으로는 참으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전능함과 무력함이 함께 모인 곳, 그곳이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자부하는 국민 주권 체제이다.(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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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주권이 문제되고, 인민이 문제되고, 같은 의미에서 대표(표상)가 문제되는 영역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나는 주권과 인민, 대표의 세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새로운 민주주의는 주권(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형식의 삶을 일정하게나마 확보한 곳, '법대로 사는' 사법주의를 넘어 '사는 법'의 윤리가 구축되는 곳, 바로 코뮨들의 구성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주권을 찬탈하기 전에 주권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둘째, 새로운 민주주의는 인민 내지 국민의 통일성이 깨지는 곳에서, 가령 '이주자'나 '난민'의 형상 속에서, 혹은 국민 안의 '비국민'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가난한 자들의 형상 속에서, 혹은 '네이션'의 해체로써 건설되는 '인터내셔널'의 운동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새로운 민주주의는 대의(대표)를 거부하거나 대의(표상)가 불가능한 존재들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즉 국적이나 성별이나 직업을 가로지르는 '사이 존재'들, 가령 국적 없이 한국에 머무르는 '네팔-한국인', 저임금 노동시장을 전전하고 있는 '대학생-노동자', 노동과 실업, 직업과 아르바이트의 불안정한 경계에 서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등으로부터 제기될 것이다. 대의(대표, 표상) 체계로부터 추방되었기에 식별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가는 이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식별불가능성으로부터 다양한 존재들의 '함께 있음'과 '함께함'이 가능한 이들.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들의 '함께 있음'과 '함께함'으로부터 발견될 것이다.(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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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된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문제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가진 후진사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어떤 완성 모델을 갖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어떤 사회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체제가 실패한 곳, 그 무능을 드러낸 곳에서 새롭게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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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민주화' 시대는 그저 달력이 넘어감에 따라 종언을 고한 것도 아니고, 민주화 세력의 일부가 대권을 차지했기에 종언을 고한 것도 아니다. 또한 민주화의 결과에 절망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로써 종언을 고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민주주의는 자신이 예견할 수 없었던 타자의 도래,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출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의 도래와 함께 종언을 고한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종언을 통해 매번 새롭게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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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린이의 진실'을 생산하지 못할 때, 다시 시작하는 자가 되지 못할 때, 그 민주주의자는 늙기 시작한다. 현 체제 안에 존재하는 '이후'의 요소를 포착하지 못하는 한에서 그 민주주의는 이미 '종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어른스러움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민주주의는 영원히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언제나 처음 질문, 즉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반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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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시위들은 앞으로 민주적 권리에 대한 요구가 그동안 자격이 없었거나 자격 행사가 봉쇄되어 온 이들로부터 계속 나올 것임을 예감케 한다. 소위 '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 주장', '자격 없는 자들의 몫에 대한 요구'가 민주주의 투쟁의 새로운 쟁점이 될 것이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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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이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삶을 가꾸는 능력이 없을 때, 대중은 삶을 지배하는 권력에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무능과 두려움 속에서 이 대표, 저 대표를 갈아타는 일만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의 운명은 결국 엘리트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데모스의 힘'이 아닌 '엘리트의 힘'이 민주주의 역량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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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삶의 새로운 실존 형식, 새로운 조직화 형식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지배와 명령의 거부가 또 다른 지배와 명령의 발생으로 이어지지 않는 삶의 형식, 복종과 의탁이 아니라 자기지배와 자기배려가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 복종이 아닌 평등한 협력을 통해 큰 힘이 발생됨을 알려 주는 삶의 형식을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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