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5. 4. 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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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까치의 배를 보았다. 이제 춥다는 말은 유통기한이 지난 말처럼 느껴진다.(20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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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우주의 원더키디'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제목 앞에 연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2025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2020년이었다. 그러니까 그 만화의 제목은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였던 것이다. 뭔가 크게 예상을 벗어난,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202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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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의 문상을 하러 가서 나는 무슨 말을 그리도 지껄였을까. 영정사진 앞에서, 향은 불이 잘 붙지 않아 당황스러웠고, 급격히 떨리는 손으로 겨우 불을 붙인 향이 향로에 잘 꽂히지 않아서 더욱 당황스러웠던. 나는 그곳에서 오래 준비한 죽음과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수육과 떡, 밥과 국을 먹으며.(202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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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일을 하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서재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잠시 들렀다. 그곳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서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책들과 잡지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일터에서 만들어 놓은 곳이니 각 잡고 책을 읽기 위한 공간은 아니고 그저 가벼운 미팅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서인지 서재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그곳의 책들을 일별 하다가 제목이 끌리면 펼쳐보기도 했다. 문득 황인찬의 시집이 눈에 띄었는데 한 두 편 정도 읽다가 제자리에 꽂아 놓았다. 며칠 빌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그림자처럼 퇴근길의 나를 따라왔다.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언제고 나는 그 시집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이 글은 시집을 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별 의미 없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뭐라도 구구절절 쓰고 싶었다는 뜻이려나.(202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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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기면 그만일 텐데, 돌부리처럼 자꾸만 걸리는 게 있다면 내가 그걸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고, 언급하기도 싫은데,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 싫고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지.(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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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 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

 

- 이승우, 《고요한 읽기》 중에서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그리하여 나는 무언가를 쓰고자 할 때면 늘 내가 읽은 책 속의 문장들을 찾고는 했다. 밑줄 친 그 문장들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실마리가 되고, 그 실마리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늘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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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말을 쓰지 않고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 절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절망에 대해서 말하기. 그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때로 어떤 글들을 읽을 때, 그 유려함에 잠시 탄복하지만 이내 심지는 없고 한없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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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시인의 말 모음집이 따로 나올 줄은 몰랐네. 그렇다면 나는 역자 후기 모음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름 아닌 배수아 작가가 자신이 번역한 책들의 후기만을 모아놓은 책!(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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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진 산불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누군가 비가 오게 하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 역시 비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실제로 그런 기술이 있다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비 때문에 또 다른 재앙이 닥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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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불이, 연기가, 재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과, 언제나 그곳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을 것만 같던 모든 오래된 것들이 한순간에 재로 바뀌어버릴 만큼.(20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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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내가 쓴 짧은 글에 대한 누군가의 지적에 어쭙잖게 분노했고, 지리멸렬하게 반박했으나, 그때는 그것이 내 지적 수준이자 내 결핍인지 알지 못했네. 다만 얼굴이 화끈거렸을 뿐. 아닌 척해도 드러나고, 도저히 감추지 못하는 어설픈 분노가 모니터 저편으로도 전해 졌겠지. 쥐구멍을 찾던 시절이 있었네. 지금은 누군가의 평가를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지만. 시간은 낯짝을 두껍게 만드니, 지금은 그저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그때만큼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으니, 이건 다행인가 불행인가. 30년 동안 글을 쓰지는 않았어도 늘 쥐구멍을 찾게 된 것이 성장이라면 성장일까.(20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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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 하냐고 직장 동료가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열렬히 하겠다고 말했다.(202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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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하는 사람은 조금씩 자신이 아니라서

좀 안 맞는 옷이나 신발을 착용한 채로도 어느덧 잘 걸어 다니고

외로움이라든가

암세포

에도 적응을 해서 어느덧

저녁의 공원에

 

- 이장욱, 「적응하는 사람」 중에서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적응하는 사람이란.(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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